올랭프 드 구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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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올랭프 드 구즈는 [[1748년]]에 [[스페인]] 인근에 위치한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그 마을의 '[[볼테르]]'였던 아버지 퐁피냥 후작과 세탁부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7세에 나이 많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일찍 남편이 죽어 아들과 [[파리 (도시)|파리]]로 올라와 생활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사교계 문사들과 재치를 겨루며 숱한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결혼]]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는 연인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세태를 꼬집는 [[소설]]과 [[희곡]] 등을 발표하였는데,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철자가 엉망이어서 집필은 [[대필작가]]에게 맡겼다는 이야기가 있다.<ref>김재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6&aid=0000009170 형제애, 구주에게 물어봐]. 한겨레21. 2005년 8월 12일.</ref>
 
흑인 [[노예제]]에 반대하는 희곡이나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는 글을 통해 약간의 명성을 얻었던 올랭프 드 구즈는 희망과 기쁨으로 [[프랑스 혁명]]을 반겼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서 내건 평등의 권리가 여성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인권선언문>에 빗대어 <여성권선언문>을 썼고,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한 [[루소]]에 비댕ㅇ적빗대어 성적 평등에 바탕 둔 결혼을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썼다.<ref>조한욱.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2866.html 형장에 설 권리]. 한겨레신문. 2011년 4월 13일.</ref> <ref>[[장자크 루소]]는 [[1762년]]에 《[[사회 계약론]]》을 썼다.</ref>
 
올랭프 드 구즈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단두대에 오른 여성으로서, 그는 프랑스 혁명을 기뻐하며 옹호했으나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보충하여 <여성권선언문>을 발표했고, 그 일로 그는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단죄를 받았는데,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1793년 급진 공화파에 의해 처형당했다. 단두대에 올라 처형된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당연히 있다"라는 유며한남말을유명한 말을 남겼다.<ref>변상욱.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03 3578 여성 참정권 쟁취 잔혹사]. 노컷뉴스. 2012년 1월 17일.</ref> <ref>이성형.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13772.html 역사는 왜 보들레르의 연인 잔 뒤발을 지웠나]. 한겨레신문. 2012년 1월 6일.</ref> <ref>고종석.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3/h2009030902431586330.htm 샤를로트 코르데- 암살의 천사 ]. 한국일보. 2009년 3월 9일.</ref>
 
== 관련 서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