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호 (1834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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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세도를 부리던 민승호가 갑자기 폭사하자,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동시에 폭사했으므로 민씨 일족들은 자신의 아들을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세우기 위해 각자 암투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민비는 만약을 대비하여 오빠의 사후 양자로 [[민영익]]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상태였다.<ref name="jy200905">[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09789 민영익 등 보빙사 큰절로 禮 갖춰] 중앙일보 2009.05.16일자</ref> 민태호는 아무리 일가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양자로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민규호 등과 민비의 거듭된 설득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jy200905"/> 민태호는 품에서 아들을 잃은 대신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민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민영익을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친하게 대했다.<ref name="jy200905"/>
 
[[1875년]] [[경기도]]감사를 지냈고, [[1878년]] 딸이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비인 [[세자빈|순명효황후]]으로 간택되었다.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1883년]] 통리군국사무아무독판, 그 뒤 총융사, 어영대장,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 대제학 등을 지냈다.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로서 [[1882년]] [[임오군란]] 때,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었는데 [[민태호]]의 집도 습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