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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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년(己卯年-중종4년 서기1509년)에 특별히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로 승차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군되셨다. 경진년(庚辰年-중종5년 서기1510년)에 북도의 진(鎭)으로 옮겨 두진을 지내시니 공로가 더욱 현저하셨다. 가정 임오년(嘉靖 壬午年;명나라 세종 원년, 조선조 중종 7년, 서기 1512년)에 동지중추(同知中樞)를 경유 전라수군절도사(全羅水軍節度使)가 되셨다. 때에 중국(명나라)에서 살생 약탈하던 왜적이 표류하여 우리 경계에 이르러 여러 섬에 출몰하였다. 공께서 진에 이르러 전함을 크게 수리하고 엄하게 기계를 이용하여 계미년(癸未年-중종8년 서기1513년) 여름에 나는 듯이 빠르게 왜선을 추격하고 적을 잡아 목을 베니 임금님은 명하여 1계급을 더하시어 인하야 활과 화살 의대(衣帶)를 하사하시고 또 시종을 보내 위로하셨다. 중종임금께서 또 백금(白金)을 하사하시고 포장하셨다. 갑신년(甲申년-중종9년 서기1514년)에 훈련원도정(訓練阮都正)에 제수하시고 을유년(乙酉年-중종10년 서기 1515년)에 성절사로 명나라 서울에 가 하례하셨다. 병술년(丙戌年-중종11년 서기1516년)에 평안도의 모사(謀師)가 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울새 모두 공을 천거하여 위촉케 하였다. 각 진을 순찰하기를 이미 마침에 군의 대오 중 병기가 낡고 무딘 것은 서둘러 새로 바꾸니 이로 인하야 군비는 일신하였다. 무자년(戊子年;중종13년, 서기1518년)에 우리진의 장사가 경망히 오랑캐 지경을 넘어가 해를 당하니 죄를 면하지 못하고 견책을 받아 당진(唐津)에 유배 되었다가 가을에 풀리어 기축년(己丑年;중종14년, 서기1519년)에 충청도 총병마(摠兵馬)가 되셨다. 임기 미만에 무망에 죄를 입고 다시 횡성에 유배되었다가 이 해에 왕의 은혜를 입고 풀려나셨다. 임진년(壬辰年;중종17년, 서기1522년)에 서직(西職-무반)의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셨다. 갑오년(甲午年-중종19년 서기1524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셨다. 공께서 평소 벼슬을 사양할 뜻으로 외직(外職)을 구하야 삼척부사로 보직되었다가 을미(乙未年;중종20년, 서기1525년)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환수되셨다. 병신(丙申年;중종21년, 서기1526년)에 병환으로 사직하시고 서울에 의원에 나아가 치료하시다 자택에서 고종하셨다. 공께서 계미년(癸未年;세조8년, 서기1463년)에 탄생하야 가정 병신년(명나라 세종15년, 중종21년)에 이르니 춘추75세이시다. 부고를 들으시고 왕께서 유사를 명하여 조문 제사하시고 관이 도와 예장하였다. 벼슬을 높여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로 승진시키시고 장양공의 시호를 내리셨다.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항상 일찍 일어나서 종일 바르게 단좌하야 게으른 모습은 하지 않으셨고 풍류와 잔치, 놀이, 오락등을 일찍이 뜻에 두지 않으셨으며 주량은 매우 크셨지만 강하게 자제하야 마시지 아니 하시어 항상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으셨다. 남을 대함에는 온화하게 하셨고 관직에 임해서는 근면을 다하셨고 일을 처리함에는 종합 정밀하야 일에 따라 분별하여 처리하셨다. 변방을 30년 동안이나 지키심에 부지런히 군비에 충실하셨고 진의 군용을 장대하게 하여 항상 적이 이르는 것처럼 하니 옛 양장(良將)들의 풍모라 하고 이로써 세상 사람들의 칭송이 많았다. 공의 배위 정부인 원주원씨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중치(仲穉)의 따님이시니 어질고 부덕(婦德)하셨다. 먼저 공께서 돌아가신지 3년 만에 또 돌아가시니 공과 함께 같은 영역 내 별실에 모셨다. 아드님 한분을 낳으시니 숙(淑)이시다. 당진현감(唐津縣監)을 지내셨고 차실(次室) 남씨(南氏)는 2남 3녀를 두셨 으니 형(泂)이요 담(淡)이요 따님은 원연손(元連孫) 신거관(愼居寬) 윤원형 (尹元衡)에 출가하였다. 현감공께서는 충의위(忠義衛) 김계훈(金季勳)의 따님에게 장가드시고 1남 1녀를 낳으시니 아드님 휘는 종영(宗榮)이시니 계묘년(癸卯年;중종38년 서기154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우찬성(右贊成;종1품)을 지내셨다. 차실(次室)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방영(邦塋) 말영(末塋)이요 찬성공(贊成公)은 1남 3녀를 낳으시니 다 어리셨다. 내 비록 연배(年輩)는 같지 않으나 공의 행적을 가장 상세히 아는 고로 찬성공의 신도비문을 나를 보고 부탁함으로 찬하노라.
{{인용문2|돌에 새겨 가로되 오랜 옛가문에 경사를 쌓으니 더욱 영원토록 무궁하리. 광유후(光儒侯)께서 근원을 열었으니 공도 그 파에 속하네. 나라 일을 사양하고 물러나 깨끗한 덕의 터전을 쌓으니 아름다워라. 말없이 행동하고 공을 많이 쌓았어도 오히려 겸손하였고 보답의 공효는 만족하지 못하나 진(鎭)을 절도있게 살았네. 스스로 부를 택하지 않아 후손에 넉넉하게 돌아감이 없었거니 하물며 화려한 가문의 법도를 이어 크게 빛냈겠는가. 책임의 보답은 후하여 옛날에도 드물었었네. 능원(陵園)에 복을 쌓아 의관을 묻었도다. 비석에 의용(儀用)을 표하야 어리고 우매한 후손을 경계하네.}}
 
== 정윤겸을 연기한 배우==
 
* 《[[여인천하 (드라마)|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배우:[[백윤식]])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