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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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동적 변화 ===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유교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어서는 당연히 타학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예 (유교)|예]][[악]] 등의 [[의례]]를 존중하는 학설은 [[겸애]](兼愛){{.cw}}[[상현]](尙賢){{.cw}}[[비악]](非樂){{.cw}}[[절장]](節葬) 등을 주장하는 [[묵가]](墨家)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에 신뢰의 기초를 두는 학설은 [[권력]]이 [[군주]]를 중심으로 일원적(一元的)으로 강화(化)되는 상태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治者)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그러한 비판이나 조소 속에서 [[전통]](傳統)과 [[중용]](中庸)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유교였다고 할 수 있다. 유교사상은 또한 타학파의 비판과 공격에 견디기 위하여 타학파의 학설 중 그 장점을 섭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