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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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셉트와 영감 ==
1966년 11월, 비틀즈의 투어 매니저 [[말 에반스]]와 폴 메카트니는매카트니는 케냐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Sgt. Pepper" 콘셉트의 추동력이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sfn|Julien|2008b|p=2}} 그의 아이디어는 [[에드워드 시대]]의 군악대와 관련되어 있었고, 이렇게 에반스가 만든 이름은 동시대의 샌프란시스코 소재 그룹인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와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와 같은 스타일이었다.{{sfn|Womack|2007|p=168}} 1967년 4월, 메카트니는매카트니는 비틀즈에게 음반 전체를 가공의 밴드의 공연으로 표현해 볼 것을 제안한다.{{sfn|Moore|1997|pp=20–21}} 이 또다른 밴드는 그들에게 자유와 음악적 실험을 가능케 했다. 메카트니가매카트니가 설명하길 "전 생각했어요, 우리 자신이 되지 말고. 다른 자아를 개발하자."{{sfn|Miles|1997|pp=303–304}} 마틴은 이렇게 회고했다.
 
{{인용문2|"페퍼 상사" 자체는 앨범을 반쯤 제작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폴의 곡이었다. 평범한 록 음악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걸 끝냈을 때, 폴이 말했다, "앨범을 페퍼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페퍼 상사가 녹음한 것 처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효과를 넣어서 말이야." 난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고, 그 순간부터 페퍼는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sfn|Martin|1994|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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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 연구가 월터 에버렛은, 페퍼 상사가 비틀즈 내 매카트니의 창조적 힘을 우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카트니는 음반의 곡 반 이상을 작사했고, 그 곡의 녹음을 통제했다. 그는 이때부터 음반이 나아갈 예술적 방향을 제시한다.{{sfn|Everett|1999|p=99}} 1966년 11월 24일,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9월 이후 처음으로 모인 비틀즈는 세션을 시작한다.{{sfn|Lewisohn|1992|p=232}}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녹음 예산 덕분에, 원하는 만큼 세션을 할 수 있었다.{{sfn|MacDonald|2005|p=215}}{{refn|group=nb|[[EMI]] owned the Beatles' recordings and [[Abbey Road Studios]], so they did not deduct fees for studio time from the band's royalty payments during the recording and production of ''Sgt. Pepper''.{{sfn|MacDonald|2005|p=215}}}} 음반 녹음에 앞서, 그들은 스스로의 어린 시절과 연결되어 있는 〈Strawberry Fields Forever〉, 〈When I'm Sixty-Four〉 그리고 〈Penny Lane〉의 녹음을 시작했다.<ref>{{harvnb|Everett|1999|p=99}}; {{harvnb|MacDonald|2005|pp=212–223}}.</ref> 첫 세션에서는 새로운 키보드 악기 [[멜로트론]]이 소개된다.{{sfn|Emerick|Massey|2006|pp=135–136}} 이것은 다양한 악기의 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한 후, 건반을 눌러 그 소리를 내게 하는게 가능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63510&cid=42605&categoryId=42605 멜로트론], 네이버 지식백과.</ref> 매카트니는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도입부에 플루트 연주를 넣었다.{{sfn|Emerick|Massey|2006|pp=135–136}} 트랙은 다른 템포와 높낮이가 녹음된 두 테이크를 이어붙이는 식으로 복잡하게 제작되었다.{{sfn|MacDonald|2005|pp=217–220}} 오디오 엔지니어 에머릭은 《Revolver》를 녹음할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고, 비틀즈의 사전에 '못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sfn|Emerick|Massey|2006|p=139}} 마틴은 페퍼 상사가 "리볼버에서 자연스럽게 생겼고", "거의 계속되는 기술적 실험의 시대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Penny Lane〉은 본래 음반용으로 녹음되었으나 [[EMI]]와 엡스타인이 마틴을 압박하여 1967년 2월에 더블 A 싱글로 발매된다. 영국에서 1위에 오르지 못하자, 영국의 통신사는 "비틀즈가 정상에 오르지 못하다", "4년만에 처음 있는 일" 그리고 "거품이 붕괴되는가?" 등의 헤드라인을 걸어 그룹의 성공이 막을 내리는 것으로 점쳤다. 발매 이후 엠스타인은 싱글 트랙이 LP에 수록되지 않을 거라 고집했다. 마틴은 나중에 이 두 곡을 놓인 것에 대해 "내 프로로서의 삶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묘사했다. 그의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와 밴드는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55시간 동안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음반 전체에 대한 안건을 정했다. 그는 "라이브로 공연할 수 없을 곡을 녹음할 생각이였다. 그들은 제작사가 될 정도로 디자인했고 거기엔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매카트니의 목적은 아직까지 만들지 못한 최고의 비틀즈 음반을 만드는 것이였고, "이제 우리의 공연이 그 레코드야"라고 언명한다. 1966년 11월 6일, 그룹은 음반의 첫 트랙이 될 〈When I'm Sixty-Four〉의 녹음을 시작한다.
 
[[파일:Studer J37 4-track tape recorder (1964-1972), Abbey Road Studios.jpg|thumb|left|alt=A colour image of a grey recording machine|페퍼 상사를 녹음할 때 쓰였던 스튜더 J37 포 트랙 머신.<ref>{{서적 인용|last=Martland|first=Peter|title=Since Records Began: EMI, the First Hundred Years|year=1997|publisher=Amadeus Press|isbn=978-1-57467-033-2|page=250}}</ref>]]
 
페퍼 상사는 포 트랙 장비를 사용하여 녹음되었다. 에이트 트랙 테이프 레코더가 미국에 있긴 했지만, 1967년 말까지 런던의 상업 스튜디오에서는 가동이 불가능했다. 이전의 비틀즈 음반처럼, 페퍼 상사는 하나에서 네개까지의 트랙을 하나의 레코더에서 믹스하고 더빙하는 포 트랙 장비로, 리덕션 믹싱이라고 알려진 기술을 범용했다. 이런 준 멀티 트랙 스튜디오는 애비 로드의 엔지니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EMI의 스튜더 J37 포 트랙 머신은 제작 중 발생하는 소음을 최소화하여 높은 품질의 레코딩을 할 수 있었기에, 리덕션 믹싱에 적합했다. 메카트니는매카트니는 자신의 베이스 파트를 마지막에 오버더빙하는 것을 선호했고, 곡의 백 트랙을 녹음하고 있을 때,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에게 곡의 최종 편곡을 보완하기 위해, 작사와 선율적 베이스라인을 녹음하는데 필요한 여분의 시간을 주었다. 〈[[A Day in the Life]]〉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녹음할 때, 마틴은 비틀즈가 연주한 반주와 오케스트라 오버더빙 테이프를 동기했다. 엔지니어 켄 타운센드는 두 머신 사이의 50 Hz 제어 신호를 사용하여 이를 달성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 커버 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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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6 = 매카트니, 레논
| 재생시간6 = 3:35
| 제목7 = Being for the Benefit of Mr. Kite!
| 기타7 = 레논
| 재생시간7 =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