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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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의 고구려 협공 요청에 따라 신라 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김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김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 " 라고 하는 면책특권을 주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김진복(金眞服)·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진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662년 [[보장왕]] 21년 2월 16일(음력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넜다. 김유신은 고구려 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장새(獐塞, 현 [[황해도]] [[수안군]] 일원)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김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 군이 도착했음을 소정방은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元曉)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 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친 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김군승 부자를 보내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바다를 통해 다시 대철수 작전을 수행했다. 마치 제2차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에 의해 완전 포위된 연합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덩케르크됭케르크]]에서 세기의 대철수작전을 했던 것과 양상이 같았다. {{참고|다이나모 작전}}
 
===표하(䕯河)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