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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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주의 운동 ====
[[1921년]]부터 그는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 개인의 가치와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인생이 [[개인주의]]적인 사상에서 다 같이 완성되며, 세계는 한없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될 때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고 향락하기 위해서, 남의 생활을 간섭치 않으며 간섭해서도 아니되며 또한 자기의 생명과 인격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남의 [[생명]]과 [[인격]]도 같이 존중히 여길 때가 올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며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일 수록 다른사람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될수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며 [[개인주의]]의 확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읽은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가정과 남자로부터 독립하고 한사람의 여자가 된 것과 틀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이 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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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중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ref name="gyemong"/> 이는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었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ref name="gyemong"/> 처음에는 [[나혜석]]에게 [[승려]]가 되라고 권고했지만 이혼 고백서 발표 직후 전시회 등이 실패하자 찾아왔을 때는 안 된다고 하였다. 특히 [[나혜석]]이 자녀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본 일엽은 [[나혜석]]이 스님이 될수될 수 없으리라 봤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