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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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계는 [[능창대군]]의 양자인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일찍 요절한 [[복녕군]]의 5대손이다.<ref>호적상 [[정원군]]-[[능창대군]]-[[인평대군]](양자)-[[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이병원-남연군 으로 이어진다.</ref> [[복녕군]]의 가문은 [[조선 숙종|숙종]] 때의 [[삼복의 변]]에는 연루되지 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과 생부 이병원은 평민 신분이었고,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판]]을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 [[이병원]]은 훗날 관직이 없이 [[진사]]로 사망하게 되지만 특별히 [[증직|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15년]](순조 15) 아들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를 택정할 때 선발되어, 그해 [[12월 9일]] [[조선 순조|순조]]의 명으로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고 이름을 구로 고쳤으며, [[소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816년]] [[중의대부]]로 승진하였고, [[현륭원]] 참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계동궁에 보내졌지만,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생활하였고 이는 [[조선 순조|순조]] 16년 [[7월]] 그의 다른 비행들과 함께 전 정언 이이희로부터 탄핵당하게 된다.
 
=== 관료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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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부교리 임안철(林顔喆)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남연군궁(南延君宮)의 하속(下屬)이 간사한 짓을 하고 공갈 협박하여 평민에게 해를 끼친 정상을 거듭 조사한즉,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 두 사람이 문하에 출입하여 도서 문적(圖書文蹟)을 청촉하여 만들어 내고, 타인의 채권을 궁전(宮田)이라 핑계대어, 지평(砥平)에 사는 고성인(高姓人)에게 전화(錢貨)를 강제로 수봉(收捧)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ref name="jangsam">순조 22권, 19년(1819 기묘 / 청 가경(嘉慶) 24년) 12월 9일(정유) 1번째기사, 형조에서 남연군궁 하속의 간사한 짓을 조사한 것을 아뢰다</ref>}}
 
순조는 '나이 어리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꾐에 빠져 이와 같은 패려궂은 짓을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유방(流放)하여도 오히려 헐하다 하겠으나, 그 노모를 생각 하여 우선 보류하라. 남연군(南延君) 구(球)에게 삭판의 율을 시행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몸을 신칙하게 하며, 잡인과 접촉 못하게 하고 궁속을 단속하여 개과 천선을 도모(圖謀)하도록 하라.'며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었다.<ref name="jangsam"/> 그러나 1년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가덕대부, 수릉관, 재궁상면상자서사관(梓宮上面上字書寫官) 등을 지냈다. [[1822년]](순조 22) [[3월 22일]] 생가의 아버지 이병원이 나이 71세가 되었음을 들어, 몽은(蒙恩, 노인에게 은전을 베푸는 것)을 상언하여 순조에게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 생애 후반 ===
약간의 한학을 하던 그는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넷째 아들의 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는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21년]](순조 21)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4월 10일]]에 [[효의왕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사망하자 남연군은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고, [[수릉관]](守陵官)에 겸임되었다. 그러나 양어머니 남양홍씨의 상을 당하여 그해 [[11월 13일]] 수릉관에서 면직되었다. 후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ref>[[민유중]]의 형</ref> 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다시 정조의 묘 건릉 수릉관이 되었다가 건릉의 수릉관으로 재직하는 공로로 건릉 수릉관 재직 중인 [[1822년]] 의덕대부, [[1825년]]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8년]](순조 28) [[4월]] [[청나라]]에 진하사가 파견되자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부사(副使) 이규현(李奎鉉), 서장관(書狀官) 조기겸(趙基謙)을 대동하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8월 12일]]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청나라]] 황제의 친필을 [[조선 순조|순조]]에게 전달하였다.<ref>순조 30권, 28년(1828 무자 / 청 도광(道光) 8년) 8월 12일(기묘) 1번째기사, 진하 정사 이구 등이 [[청나라|]] 황제가 친신을 보낸 것에 감사를 표한 사실을 아뢰다</ref> [[1829년]] [[3월]] [[조선 영조|영조]] [[조선 진종|진종]], [[조선 정조|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ref>순조 30권, 29년(1829 기축 / 청 도광(道光) 9년) 3월 6일(경자) 2번째기사, 남연군 이구가 영조·진종·정조 어필의 간행을 건의하다.</ref>
 
[[1828년]](순조 28) [[2월 1일]] 장남 [[흥녕군]] 이정응이 19세로 요절했고 [[1831년]]에는 부인 여흥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순조 32)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1833년]]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11월 13일]] [[조선 순조|순조]]가 사망하자 왕세손 [[조선 헌종|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그는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었는데 [[1822년]]부터는 [[당뇨병|소갈증]]과 [[신장병|신장풍]]으로 14년간 앓다가 1836년 [[3월 19일]]에 병사하였다.
 
=== 사후 ===
1836년에 죽은 후에 처음에는 [[경기도]] [[마전현]] 미산면 백자동(지금의 대한민국 [[연천군]] [[미산면 (연천군)|미산면]])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연천군)|남면]] 남송정(南松亭, 현 [[연천군]] [[군남면 (연천군)|군남면]] 진상리 큰피우개(大稷洞) 부락)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충청도]] [[덕산현]] 덕산면 상가리(현 [[예산군]] [[덕산면 (예산군)|덕산면]] 상가리 5-29)로 개장되었다. 아들 [[흥선대원군]]은 약령(弱齡)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뒤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충청남도)|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때 가야사에 의문의 방화가 난 뒤, [[흥선대원군]] 형제는 가야사가 소실된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시신을 묻으려 땅을 팠지만 큰 돌이 있어 깨지지 않았다 한다. 두 형 [[흥완군]]과 [[흥인군]]은 밤에 도사가 나타나 자신의 집을 부순 대가를 받게 하겠다고 저주했고, 두 형의 악몽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네가 사람의 자손이라면 아버지를 좋은 곳에 모시려는 뜻을 저버릴수 없다며 호통친 뒤 돌이 깨졌다 한다.
 
[[1845년]] 덕산 가야산 북쪽 언덕 구광지에 이장되었던 그의 시신은 다시 이장되어, [[1846년]] [[3월 18일]] 같은 가야산 가운데 언덕 건좌(乾坐)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