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프 본 윌리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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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alph Vaughan Williams Plaque - geograph.org.uk - 1050250.jpg|thumb|]]
 
본 윌리엄스는 1872년 10월 12일, 영국 서남부 [[글로스터셔 주]]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런던 사람임을 자처했다. 그가 3세 나던 해인 1875년에 아버지 아서 본 윌리엄스(Arthur Vaughan Williams)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버지의 가계는 탁월한 법률가 집안이었으며, 어머니의 가계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아버지 [[조지아 웨지우드]]와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과 연결되는 등 본 윌리엄스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는 6세 때 일찍부터 음악에 흥미를 보여 이모로부터 처음으로 피아노와 통주저음 및 화성법을 배웠다. 이 무렵 그는 로팅던(Rottingdean)에 있는 예비학교에 다니면서 피아노 뿐 아니라 7세 때 [[바이올린]]과 [[오르간]]에도 친숙해지게 되었다. 그 후 14세 때 차터하우스(Charterhouse) 공립 학교에 들어가 학교 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했으며, 다시 런던의 [[왕립음악대학]](RCM)에서 2년, 그 후 케임프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3년간 수학하여 학위를 받는다. 그 후 다시 왕립 음악학교에왕립음악대학에 가서 몇 년을 더 수학한다. 그 동안 그는 작곡을 페리(Parry), 우드(Wood), 그리고 스탠퍼드(Stanford) 등에게서 배운다.
 
본 윌리엄스는 학창 시절부터 작곡에 점점 더 열의를 보였으나, 진보가 더딘 편이라서 그를 가르쳤던 우드는 본 윌리엄스가 작곡가 되리라고는 믿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종사촌인 그웬 레이브라트(Gwen Raverat)는 그녀의 케임브리지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어리석은 젊은 친구 랠프 본 윌리엄스는 그토록 희망이 없으리만치 못하면서도 음악을 계속해 나가려고 했다.’'''고 쓰고 있다. 나중에 본 윌리엄스는 자신도 ‘아마추어적 테그닉’ 밖에 가지지 못했음을 시인한 바 있다. 그리나 그가 젊은 시절에 그렇게 암중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영국의 음악 풍토에 대한 불만과 그 자신의 길을 빨리 찾지 못했던 까닭이다. 본 윌리엄스는 18살에 왕립음악대학에 들어갔고 23살에 런던 사우스 램버스의 성 바르나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다. 작곡가는 교회 예배에서 반주를 하고 합창단을 훈련시키며 지역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직접 창단하기도 했다. 그에게 음악은 이론적인 문제 이전에 언제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전문가적 기량을 길러야 했음 통감했기에 25살 때인 1897년 애들린 피셔와 결혼한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를 사사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뒤인 1908년 또다시 “둔탁하고 답답하며 막다른 길에 이르렀고, 프랑스적인 품위가 좋을 것 같다”며 파리로 건너가 [[모리스 라벨]]에게 배움을 청했다. 하지만 스승 라벨이 오히려 자기보다 3살 연하였다. 브루흐와의 만남이 낭만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라벨과의 교유는 본 윌리엄스가 목말라했던 체계적 관현악 기법을 흡수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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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본 윌리엄스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오랜 기간 심혈을 쏟았던 교향곡 1번 ‘바다’가 리즈 페스티벌에서 그해 10월 빛을 본 것이다. 오랫동안 악보 상으로만 존재했던 작품이 실제 소리를 내게 됐고, 본 윌리엄스는 초연 직전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할 정도로 초조해했다. '바다교향곡' 초연 직전인 9월에는 글로스터의 합창 페스티벌에서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도 초연되었다. 이 무대에서 함께 선보인 작품이 바로 [[에드워드 엘가]]의 <[[제론티우스의 꿈]]>이었다. 본 윌리엄스의 출세작이 된 이 환상곡에는 작곡가가 채집하고 발굴했던 튜더 왕조 시대 영국 음악의 정취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8번 (말러)|천인교향곡]] 초연에도 참석했다.
 
이 때 그는 창조적 구원을 외국 모델을 모방함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 자라온 영국의 여러 원천들을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재생성시키는 데서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민요와 엘리자벳 시대의 음악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어 음악적 시민의식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이러한 흥미와 이상을 그는 왕립 음악학교왕립음악대학 동창생이자 친구인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와 함께 추진하여 수많은 민요의 채집에 나선다. 홀스트와의 이렇게 맺어진 우정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그 두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을 서로 칭찬하고 비판해주면서 자신의 기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우 관계는 1934년 홀스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본 윌리엄스는 9편의 교향곡과 다른 관현악 작품들, 가곡들, 오페라와 많은 합창곡들을 발표했다. 다양한 규모와 형식을 가지고 있는 본 윌리엄스의 음악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2가지 원천으로부터 꾸준히 유도되었다. 하나는 홀스트와의 우정을 지속하면서 채짐한 영국 민요와 성가이고, 다른 하나는 [[바흐]], [[헨델]], [[드뷔시]]와 라벨의 서구적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의 근본적인 본질은 어느 유력한 한 작곡가의 영향으로부터 암시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심원한 깊이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작곡가는 스스로를 결코 닫지 말고 예술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호흡하여 자신의 작품을 사회의 모든 삶의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대한 본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