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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1897년]](광무11년) 2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이 끝나자 정계와 손을 끊고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한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취하며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1916년]]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고 자결함으로써 순교(殉敎), 순국(殉國)하였다. 아버지는 유학 나용집(羅龍集),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ref name="나철">『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총본사(1971년)</ref>
 
{{IPA|}}
== 생애 ==
[[전라남도]] [[보성군|보성]] 출신<ref>[http://db.history.go.kr/url.jsp?ID=ch_ad_1900_05_03_0020 나철의 출신지]는 전남 보성이지만,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할 당시 그의 거주지는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이었고, 1900년 나인영으로 개명할 당시에는 전북 전주에 살았다. </ref> <ref>[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manage_no=1624&judge_case_item_cd=196200_SSG00005_1624&keyword=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재되어있다.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ref> 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1891년(고종 28)에 ×¹나두영의 문과방목], </ref>하고 이어 1891년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군|강진]]의 오기호, [[부안군|부안]]의 [[이기 (1848년)|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오적암살단을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후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