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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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금착명철검]](金錯銘鐵劍)에는 5세기 중순의 일본의 지방 호족이 작성한 '오오히코(意富比垝)'에서 '우와케노오미(乎獲居臣)'에 이르는 8세대에 걸치는 계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철검에 새겨진 '오오히코'를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제8대 [[고겐 천황]](孝元天皇)의 제1황자 「오오히코노 미코토(大彦命)」(4도 장군의 한 명)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었고, 가와구치 가쓰야스(川口勝康)는 명문에 나오는 「우와케(乎獲居)」를 「오오히코」의 손자 「데요카리와케(弖已加利獲居)」로 보고, 도요카리와케노 미코토(豐韓別命)는 다케누나카와와케(武渟川別)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지만, 철검 명문에서 데요카리와케는 다카리소니(多加利足尼)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의 발견으로 5세기 중순의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의 실재를 인정한 다음, 그 전후, 특히 [[닌토쿠 천황]](仁德天皇) 이후의 일본내 전승에 일정한 진실성을 부여하려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한편에서는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고사기》나 《일본서기》, 《가미노미야기(上宮記)》의 기술은 신용할 수 없고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이전의 오키미의 이름이나 계도 등은 신뢰성이 부족하며,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의 명문에 대해서도 한자 읽기 방식을 딱 잘라서 짚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 《가미노미야기조구키》, 《제기》, 《구사》, 《고쿠기》, 《천황기》 와의 관련 ====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에 의해 일본 최초의 '국사'가 성립되기 전에도 각종 계도(系図)가 존재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게이타이 천황 즉 오오도노 오키미(オホド王)의 계도를 기록한 《가미노미야기조구키(上宮記)》나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가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만약 스이코 천황 때인 600년경 《가미노미야기조구키(上宮記)》가 성립되었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사망한 [[531년]]과는 70년의 차이가 있다). 덧붙여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편찬의 기본사료가 된 《제기(帝紀)》, 《구사(舊辞)》는 7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 20년([[620년]])에 "이 해에 황태자는 시마노 오오오미와 함께 의논하여, 천황기(天皇記) 및 고쿠기(國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 180부와 공민(公民) 등의 본기(本記)를 기술하였다(是歲 皇太子、島大臣共議之 錄天皇記及國記 臣 連 伴造 國造 百八十部并公民等本記)"는 기록을 전하고 있지만, 이러한 야마토 왕권의 사서 편찬에 이바지한 정확하고 충분한 문자 기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할 뿐더러,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대부분은 구비전승에 의지해야 했다고 추정된다. 이때 쇼토쿠 태자가 만들었던 역사서 《고쿠기》나 《천황기》는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 이루카(入鹿) 부자가 멸망할 때 대부분 소실되고 화재를 면한 일부가 [[덴지 천황]](天智天皇)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 한국계 사서와의 대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