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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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22|7|4|1846|1|29}}
| 사망지 =
| 직업 = 구한말대신, 독립운동가
| 경력 =
| 작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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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
}}
'''김가진'''(金嘉鎭, [[1846년]] 음력 [[음력 1월 29일]] ~ [[1922년]] 양력 [[7월 4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독립운동가로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안동이다. 병자호란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 [[김상용말기]]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문신]]이다. 직계후손이며후의 예조판서 김응균의독립운동가로 아들이다활동한다.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신 안동 김씨|신 안동]]. [[병자호란]]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의 직계후손이며 [[예조판서]] [[김응균]]의 아들이다.
판사대신 주일공사(駐日公使)를 역임하고 [[갑오경장]]때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일제강점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작위가 주어졌으나, 이후 대외활동을 하지않았다.
 
판사대신 주일공사(駐日公使)를 역임하고 [[갑오경장갑오개혁]]때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일제강점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작위가 주어졌으나, 이후 대외활동을 하지않았다.
 
1919년 [[의친왕]] 망명기도사건에 가담하였고, 자신 역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아호가 동농이므로 '''동농 김가진'''으로 부른다.<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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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
* 11대조 : 우의정 증영상 문충공 선원 [[김상용]]
* 10대조 : 이조참판 부제학 수북 [[김광현]]
* 9대조 : 수원부사 증이조참의 김수인
* 8대조 : 증이조참판 김성우
* 7대조 : 무주부사 도정 모주 [[김시보]]
* 6대조 : 보은군수 증이참 김순행
* 5대조 : 증이조판서 김이진
* 고조부 : 영천군수 동지중추부사 김도순
* 증조부 : 부평부사 증이참 김세근
** 조부 : 증이조판서 김병성
*** 부친 : 예조판서 김응균
**** 아들 : [[김의한]]
**** 자부 : [[정정화]]
***** 손자 : [[김자동]]
 
== 함께같이 보기 ==
* [[대한제국]]
* [[상하이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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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일제 강점기 사람]]
[[분류:이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