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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이명식(1720년 ~ 1800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 == 생애 ==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안찰방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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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식([[1720년]] ~ [[1800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
== 생애 ==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안찰방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뒤 문학을 거쳐 어사로 나갔다가 부교리, 집의, 교리, 선교관, 응교 등을 거쳐 [[승지]], [[대사간]]을 거쳐 다시 [[좌부승지]], [[대사성]], [[이조참의]], [[대사간]]을 하고 경상도관찰사로 승진, [[대사간]], [[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바로 정조 때 [[좌승지]]가 된다. 이후 [[사헌부]][[대사헌]]으로 임명되어 [[대사헌]] 시절 엄정한 관리로 칭송을 받았고 홍충도관찰사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 [[사헌부]][[대사헌]]을 하다가 바로 [[대사헌]], [[호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와 [[사헌부]][[대사헌]]을 한 뒤에 [[대사헌]]으로 지경연사를 겸하다가 [[판의금부사]]가 되고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연이어 [[이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곧 [[좌참찬]]이 된다. [[의정부]][[좌참찬]] 시절 정조의 신임을 받아 [[판의금부사]]를 하다가 [[병조판서]], [[예문관]][[제학]]을 거쳐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이후 [[형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다시 한 뒤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로 다시 임명되고 이후 [[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번갈아 하다가 [[형조판서]]에 승진, [[홍문관]][[제학]]으로 지경연사를 겸하다가 [[형조판서]]가 된다. 이후 [[판의금부사]], [[좌참찬]],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하는데 [[의정부]][[좌참찬]]을 여러차례 하기도 했다. 이후 [[판의금부사]], [[병조판서]] 등을 거쳐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번갈아 한 뒤 바로 [[의정부]][[우참찬]], [[예문관]][[제학]], [[판의금부사]]를 두루 거쳐 [[좌참찬]], [[판의금부사]], [[예문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바로 [[홍문관]][[제학]]으로 조정에 돌아와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등을 거쳐 [[예문관]][[제학]]으로 있다가 지중추부사로 퇴직했지만 다시 [[판의금부사]]로 조정에 복귀, 서사관을 겸하다가 [[예문관]][[제학]]에 임명되고 곧 [[호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하다가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는데, 곧 수원유수로 임명되어 정조의 수원화성 건축을 관리하게 된다. 이후 판중추부사로 승진한 뒤, [[병조판서]]로 복귀했고 판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가 봉조하에 제수된 뒤 1800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관직이 추탈되었지만, 나중에 복권된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안찰방이 되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뒤 문학을 거쳐 어사로 나갔다가 부교리, 집의, 교리, 선교관, 응교 등을 거쳐 [[승지]], [[대사간]]을 거쳐 다시 [[좌부승지]], [[대사성]], [[이조참의]], [[대사간]]을 하고 경상도관찰사로 승진, [[대사간]], [[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바로 [[좌승지]]가 된다.
[[분류:1720년 태어남]]
[[분류:1800년 죽음]]
[[분류:권세가]]
[[분류:조선의 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