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재단작성
Yoo Youngkuk(토론)의 17442113판 편집을 되돌림 - 백:이해관계
1번째 줄:
'''유영국'''(劉永國, [[1916년]]~[[2002년]])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9C%A0%EC%98%81%EA%B5%AD&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79579 서양화가 유영국] 네이버 인물정보</ref>
== '''유영국 (1916~2002)''' ==
Born: 1916
 
== 생애 ==
Died: 2002
[[경상북도]] [[울진군|울진]] 출신이다. [[1937년]]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유화과를 졸업했고, [[1937년]]부터 [[도쿄]]에서 추상회화(抽象繪畵) 운동에 참가, 일본 독립전(獨立展)과 자유미전(自由美展)에 출품하여 수상하고 동 회우(會友)로 있었으며, N.B.G 동인전을 [[긴자]]에서 열기도 했다. 해방 후 [[1948년]]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 1956년에는 모던 아트협회의 동인으로 활약했고 [[1962년]] 신상회(新象會)의 결성에도 참가했다. 1959년 이후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및 도쿄 국립미술관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이스파 국제전에도 출품했다.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1964년]]과 [[1970년]] 사이에 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 작품 세계 ==
Nationality: Korea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회화로 일관해온 그의 작품경향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축성을 보이는데 주로 산을 테마로 하여 암록색조(暗綠色調)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으로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특유한 화면을 전개시킨다. 작품으로 〈산〉 등이 있다.
 
== 함께 보기 ==
Education: 일본 동경문화학원 유화과
* [[유영국미술문화재단]]
 
== 각주 ==
Known for: 추상미술
<references/>
 
== 바깥고리 ==
Movement: 모더니즘, 추상미술
* [http://www.yooyoungkuk.org/ 유영국미술문화재단]
 
Spouse: 김기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20대 초반 동경에서 추상미술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대표적 전위 미술가 단체전인 자유미술가 협회전(自由美術家 協會展)의 창립멤버이며, 2회전(1938)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광복 후에는 신사실파(新事實派), 모던아트협회 창립멤버로서 한국의 추상미술을 이끌었다. 그는 자연, 그 중에서도 특히 ‘산’을 즐겨 그려 “산의 작가”라고 불렸으며, 강한 원색의 색채를 사용하여 “색채의 마술사”라고도 불렸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1]]]. 그의 작품은 스케일이 크며, 강한 선과 면으로 구성된 비구상적 형태로서의 자연을 그렸는데,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패턴의 면 분할, 구축적이고 절제된 구성은 자연의 장엄함, 숭고함과 아울러 절대적인 미를 느끼게 한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었으며, 일관된 조형세계와 작가로서의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전업작가들의 표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Contents'''
 
== '''1. Early life''' ==
유영국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1916년 강원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울진은 동해안의 항구이자 태백산맥의 끝자락이어서, 그의 생가에서 동쪽으로 약 1 Km 가면 바닷가이고 서쪽으로 약 20km 내에 응봉산(999m), 통고산(1066m) 등 높은 산이 병풍같이 막아 선 두메산골이다. 그의 할아버지 유재업(~1913)은 울진의 부농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유문종(~1946)은 대한제국 말년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군량미를 지원하고, 울진 제동학교'''(1922 - 1943)'''를 설립하였다.
 
유영국은 울진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4세에 상경하여(1930) 제 2고보(지금의 경복중고등학교, 당시 5년제)에 진학하였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교칙이 매우 엄격하고 한국학생들에 대한 감시가 심하던 때였다. 제 2고보에는 사또 구니오씨가 미술교사로 있었는데, 일본인 교사였지만 학생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유영국, 장욱진, 이대원 등 당시 제2고 재학생들 중에서 중견화가가 많이 배출된 데에는 사또 선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감시적인 학교 분위기를 싫어한 그는 제 2고보를 중퇴하고(1935)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의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문화학원은 다른 미술학교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영국은 바로 이러한 예술적인 분위기에 끌렸기 때문이다.
 
== '''2. Tokyo Period (1935~1943)''' ==
일본의 전위미술운동은 1920년대에 시작되어 유영국이 일본에 도착한 35년경에는 러시아 미래파의 구성주의가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Hasegawa Saburo (1905~1957), Murai Masanari (1905~1999) 등 파리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조의 avant-garde 운동이 활발히 태동하고 있었다.
 
=== '''2.1. 추상미술''' ===
당시 문화학원에는 추상화를 전공하는 교수가 없었지만, 유영국은 새로운 것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추상회화를 선택하고, 37년 제 7회 독립미술가 협회전을 통해 화단에 데뷔하였다. 이 전시에 유영국은 <랩소디(그림 1)>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이 작품은 기계들을 배치하여 무대를 디자인하는 러시아의 구성주의 포포바의 도면과 흡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 당시 일본 전위미술이 러시아의 미래주의,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2|[2]]]. 같은 해에 창립된 자유미술가 협회전에 제 1회부터 참여하여, 2회 협회전에서 <작품 B(그림 2)>로 최고상을 수상하고 3회 때에 회우가 되어 일본 화단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작품은 그림 3, 4 를 제외하고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고, 일부 릴리프 작품이 엽서로 남아 후일 복원되었는데''',''' 1930년대에 파리 화단을 이끌던 추상 창조 그룹(Abstraction-Creation, 1931-36))의 Mondrian이나 Arp의 작품과(그림 9, 10)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유영국이 세계 화단의 최첨단 조류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3|[3]]].
 
=== '''2.2 사진''' ===
유영국은 오리엔탈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배워(1940), 자유미술가 협회전에 사진 작품을 출품하였다(1941,42). 당시 하세가와 사부로 등 화가들은 전쟁기록화 제작에 동원되는 것을 피하려고 사진을 출품하였는데, 훗날 유영국은 미래의 생계수단으로 사진을 배웠다고 회고하였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4|[4]]]. 엽서에서 복원된 그의 사진 작품들은(그림 11,12) 대부분 경주 고적을 담고 있는데, 러시아 구성주의가 추구했던 사물의 물질성과, 예로 마모된 돌의 표면이 주는 독특한 질감과 같은, 대상물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5|[5]]].
 
== '''3. 10년의 공백 (1943~1955)''' ==
유영국은 1943년 귀국하여 그 다음 해 김기순과 결혼하고, 해방 후 수년간 집안의 어업을 도와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하였다. 그는 47년 상경하여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도안과 전임강사로 취임하면서 미술활동을 재개하는 시도를 하였다.
 
=== '''3.1 신사실파''' ===
유영국은 김환기, 이규상과 신사실파(1948-1953)를 결성하고 48년 12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각자 10 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전시회를 하였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6|[6]]]. 이 전시회는 53년까지 3회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비록 소수였지만 일본에서 순수추상운동에 가담하였던 작가들의 동인체이며 매우 선명한 조형이념을 갖고 있었다. 유영국은 창립시부터 줄곧 동인으로 참여하여 신사실파의 성격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로 이어지는 시기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을 맥락화시키고 정착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7|[7]]]. 그리고 이미 이때부터 유영국의 화면에선 추상에서 출발하지만 때론 주체적인 자연적 모티프들이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 '''3.2 한국 전쟁: 암흑기''' ===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던 그는 종군화가로 나서라는 제의를 받고 숨어 지냈는데 기아와 절대적 빈곤으로 고충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중공군 침입으로 인한 1.4 후퇴 때 울진으로 피난을 하였으나 그곳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부친 소유의 죽변의 양조장과 어선을 이어받아 수년간 술을 만들고 고기잡이에 나서는 노동을 하였다. 사업 수완이 좋고 전력투구하는 성품으로 그의 사업은 번창하며 울진군의 유지가 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길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1955년 서울로 상경한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서부터 5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까지 한창 창작 의욕이 충만한 2,30대에 창작에 몰두할 수 없었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더없이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53년 부산에서 열린 신사실파 3회전에 출품하였으나, 이 시기 제작된 작품의 수는 매우 희소한 편이다(그림 13, 14). 하지만 이들이 유영국의 청년기 작품세계의 성격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변화하였는지를 짚어볼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8|[8]]].
 
== '''4. 추상의 길''' ==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 1943-45)을 보내고 상경한 그는 화구도 구하기 어렵고 외국 미술계의 동향에 대한 정보가 없는 가운데 미래의 진로에 대해 고심한다. 그는 오래 계속할 수 있는 모티프로 산을 선택하였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업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끝까지 이 신조를 지켰다. 잠시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과장으로 일했지만(1966 -1970) 잃어버린 10년을 벌충할 생각으로 그만두었다. 그는 4.19, 5.16 두 번의 혁명 후인 1961년에는 현대미술 연합의 대표로 추대되었으나 64년 제 1회 개인전을 필두로 개인전 위주의 작품 활동을 펴나간다. 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수입된 미술서적을 통해 세계 화단의 동정에 대해 알게 되었고, 63년 “상파울로 비에날레”, 64년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에 출품하였다. 63년 김환기가 도미하여 미국 화단과 현지 화가들의 근면함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 그는 커다란 자극을 받았고, “나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다”는 투지로 76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고향에 양주장 사업을 돌보러 때때로 내려가는 것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의 노동에 매달렸다. 이때 생긴 직업병으로 그는 척추에 무리가 와, 후일 휠체어에 앉아 작업해야 했다. 
 
=== '''4.1. 1955-58: 태동기''' ===
이 때는 한국 화단에 추상미술이 본격화되던 시기로, 55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57년 <모던아트협회>가 결성되자 창립회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작품은 다소 복잡하고 다양한 공간분할과 면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굵고 검은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견고한 기하학적 형태의 면들과 제한된 원색의 물감을 두텁게 덧바름으로써 생겨나는 독특한 질감을 발견할 수 있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9|[9]]].
 
울진이나 죽변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해방 전 절대 추상에서 약간 빗겨간 양상을 들어낸다.
 
=== '''4.2. 58-67: 자아 실현기''' ===
58년에 오면서 화면은 검은 획선이 사라지고 색면 자체가 구성의 주체로 자리잡는다. 예리한 획선은 거대한 지각의 폭발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예리한 빗살은 화면에 커다란 동적 에너지를 부여한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0|[10]]]. 유영국의 작품을 관통하는 조형적 요체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구성의 밀도인데''',''' 김병기는 이것을 “폭발하는 용암처럼 내면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드라마를 형성한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1|[11]]]” 하였다. 섬광처럼 화면 여기저기를 가로 지르는 예리한 빗살은 이 드라마를 더욱 고양시키는 듯하다. 당시 그의 작품을 두고, 평론가 이일은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한 광휘에 찬 색채 구사는 보기 드문 완숙에 도달하고 있는 듯하다”고 하였고[[: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2|[12]]], 김영주는 “작품세계에서 우리 시대의 찬란한 금자탑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3|[13]]]. 이전 시기의 작품들이 엄격한 구조를 통해 자연이라는 대상을 나타내었다면 이 시기는 어떠한 틀에서 해방되어 역동성과 운동감을 표출하며 긴장감을 전달하고 있다.
 
=== '''4.3. 1968~1972: 기하 추상(geometric abstraction)''' ===
이 시기는 유영국이 50대에 접어든 시기로서 이전까지의 작품 속에서 보여주었던 거친 표면의 질감 등의 표현적인 성향이 사라지고 기하학적인 형태와 원색의 색체를 사용해 화면을 채우는 등의 전체적으로 정돈되고 안정된 느낌의 작품이 창작되는 시기이다. 대부분의 추상작가들은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추상작업에 다다르기 보다 일정 구성 단계를 거쳐 이에 이른다. 하지만 유영국의 경우는 그 시작부터가 추상이었으며, 평생에 걸쳐 구성주의적 패턴 속에서 자연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기에 한국 화단에서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4|[14]]].
 
그의 작품은 정방형의 화면 공간을 대각선과 수평, 수직선으로 분할, 그들의 교점에서부터 파생되는 선과 면들이 화면을 분할하며 리듬감을 전달한다. 자연 대상의 외관을 가장 기본적인 구조로 단순화시키고 동일한 이미지의 반복과 중첩을 통해 공간의 깊이감과 원근감, 운동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5|[15]]]. 또한 원색과 보색의 사용을 통해 강한 시각적 효과를 전달하고 있다. 특히 1972년에는 자연의 형상, 특히 산의 형상이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여전히 화면을 구성하는 색조는 몇몇의 원색이며 화면은 전 시기에 비해 평면화된다. 또한 산맥이라든가, 태양 빛에 의한 음영의 표현도 두드러지며 이전의 다소 주관적인 구성과는 달리 객관적인 선과 면에 의한 화면의 구성이 이 시기의 특징이 된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6|[16]]].
 
=== '''4. 4. 1973~1979: 서정의 시대''' ===
60대에 접어든 이 시기의 작품에 나타난 자연의 모습은 좀더 유연한 선과 부드러운 색채로 서정적 풍경을 보여준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7|[17]]]. 긴장과 엄격함보다는 화면이 정서적으로 순화되어 우리가 흔히 대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화면 공간이 특징이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8|[18]]]. 1977년 유영국은 등촌동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작업실 뒤에 나무가 많은 작은 동산이 있고, 꿩도 날아 오고 하였다. 이 시기 작품에는 Y자 형으로 그린 나무들이 많이 등장하며, 기존의 작업들이 삼각형에서 추출된 직선에 의해 산을 묘사하고 있었다면 이 시기 작품에서는 산의 모습이 다소 순화되어 완만하고 둥글게 묘사되어 있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19|[19]]].
 
=== '''4.5. 1980~1992: 말년''' ===
유영국의 말년은 투병으로 얼룩져 있다. 심근경색, 골절, 심장수술, 고관절 수술, 풍(stroke)로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고 작업은 주로 휠체어에 앉아 하였다. 1996년 60세가 되던 해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기초를 좀 더 해보고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했었다. 현재 나에게는 노인으로서의 노년의 흥분이 좀 더 필요하다. 요즘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20|[20]]]”이라는 말을 남겼다. 인터뷰와 같이 그는 말년에도 하루 2 시간 정도의 작업으로 조형의지를 늦추지 않았다. 등촌동 시대와 방배동 시대(1987년 이후)로 이어지는 시기이며 작품은 순도 높은 색채와 부드러운 화면 처리가 더없이 순화된 양상으로 반영되어 마치 잘 익은 과일같이 푸근함과 여유로움을 준다. 화면은 완전히 평면화 되고, 하늘, 해, 나무 등이 원과 삼각형, 사각형 등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패턴으로 반복되어 환희를 표현한다.
 
== '''5. Death''' ==
그의 말년은 병마로 고통에 시달렸던 때이다. 유영국은 타고난 건강체질이었지만 겹치는 병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있어 창작 활동도 리듬이 깨어질 때가 많았다. 조금 과로하면 금방 팔이 꼬부라지고 입이 돌아가는 중풍증세가 나타났으며 심근경색으로 몇 차례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다. 좁은 화실에서 하루 10시간을 서서 일했던 후유증이었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21|[21]]]. 그러나 작품은 그지없이 평화롭다. 아마도 그러한 마음의 자세가 그의 삶을 지탱시켜 주었을지도 모른다. 세 번에 걸친 수술은 목숨을 건 일이었는데, 본인은 언제나 태연하였다. “언제던지 죽는 날 죽지” 하는 생각으로 살았으니 남의 눈치 볼 필요도, 생에 대한 남다른 애착도 지닐 필요도 없이 그저 담담한 심정으로 자신을 가누었다는 게 옆에서 지켜본 부인의 술회다[[: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22|[22]]]. 그는 종종 “아무 눈치 보기 싫어 그림을 택했는데, 지금 내가 누구 눈치를 볼 것인가[[: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23|[23]]]”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림을 선택하였기에 자유로웠고, 그래서 창작에 자신의 전부를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2002년 11월 11일 타계하였는데, 그의 묘비명은 “산은 내 안에 있다”이다.
 
== '''6. Reference''' ==
유영국저널 제 2집
 
유영국저널 제 7집
 
김광우, <추상풍경화 유영국의 조형성> 에서 재인용, 교수신문
 
삶과 창조의 지평, 오광수
 
한국 최초의 순수 화가동인, 신사실파, 이인범
 
호암미술관 전시 카탈로그, 1996
 
갤러리현대 10주기 전시 카탈로그, 2012
 
www.yooyoungkuk.org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1]]] 오광수,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가 유영국, 삶과 창조의 지평』, 마로니에북스, 2012, p. 222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2|[2]]] 정영목, 「유영국의 초기 추상, 미술이론과 현장」, 제 3호 학고재, 『유영국저널 제 2집』, 미술문화, 2005, p.42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3|[3]]] 오광수,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가 유영국, 삶과 창조의 지평』, 마로니에북스, 2012, pp. 33-34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4|[4]]] 위의 책, pp. 43-44.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5|[5]]] 위의 책, p. 44.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6|[6]]] 박천남, 『유영국 개인전 전시 도록』, 호암미술관, 1996, p.146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7|[7]]] 이인범, 『신사실파, 한국 최초의 순수화가 동인』, 미술문화, 2008, p. 37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8|[8]]] 이인범, 「1953년 작품 발굴 리포트」, 『유영국저널 제 7집』, 미술문화, 2010, p. 17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9|[9]]] 박천남, 『유영국 개인전 전시 도록』, 호암미술관, 1996, p.146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0|[10]]] 오광수, 「추상적 형상과 색면의 구성: 유영국의 작품 세계」, 『유영국 10주기 전시카탈로그』, 2002, 마로니에북스, p.31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1|[11]]] 위의 책, p.32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2|[12]]] 위의 책, p.33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3|[13]]] 위의 책, p.33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4|[14]]] 박천남, 『유영국 개인전 전시 도록』, 호암미술관, 1996, p. 144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5|[15]]] 위의 책, p. 151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6|[16]]] 위의 책, p. 151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7|[17]]] 김광우, 「추상풍경화 유영국의 조형성」, 『교수신문』, 2003. 12.1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8|[18]]] 박천남, 유영국 호암미술관 도록, p. 151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19|[19]]] 위의 책, p.152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20|[20]]] 김광우, 「추상풍경화 유영국의 조형성」, 『교수신문』, 2003. 12.1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21|[21]]] 오광수, 「추상적 형상과 색면의 구성: 유영국의 작품 세계」, 『유영국 10주기 전시카탈로그』, 2002, 마로니에북스, p.236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22|[22]]] 위의 책, p.236
 
[[:파일:///D:/유영국미술문화재단/홍보/위키피디아/유영국 위키피디아 이사님 수정본.docx# ftnref23|[23]]] 위의 책, p.237
[[분류:1916년 태어남]]
[[분류:2002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