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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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이름 = 봉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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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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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시호 = 의민 (懿愍)
|배우자 = [[동래 정씨]] [[정유인]](鄭惟仁)의 딸
|자녀 = 없음 (양자 [[문성군]])
|본명 = 이완(李岏) 또는 이항(李 山+亢)
|왕가왕조 = [[조선]]
|왕조 아버지 = [[조선 왕조중종|중종]]
|아버지 = [[조선 중종]]
|어머니 = [[희빈 홍씨]]
|부모 =
|친척 = [[홍경주]](외조부) 외
|출생일 = [[1528년]]
|출생지 = [[조선]]
|사망지 = [[조선]] [[강원도]] [[평창군|평창]]
|사망일 = [[1547년]] [[음력 9월|음력 윤9월]]
|사망원인 = 사사
|능묘 =
|능묘좌표 =
|매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국적 = [[조선]]
|매장지좌표 =
|거주지 =
|국적 = [[조선]]
|서명 =
|종교 =
|웹사이트 =
|각주 =
}}
 
'''봉성군'''(鳳城君, [[1528년]] ~ [[1547년]] [[음력 9월|음력 윤9월]])은 [[조선]] 시대의 왕족이다. [[조선 중종|중종]]과 그 후궁 [[희빈 홍씨]]의 차남이다. [[성씨|성]]은 [[이씨|이]](李), [[이름]]은 완(岏) 또는 항(山+亢)<ref name="geon">[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6720&mobile&categoryId=2970 《국조인물고》〈이건〉]</ref>,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는 자첨(子瞻)이다<ref name="isshi">[http://www.rfo.co.kr/html/pachong_view.php?mode3=history&No=85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봉성군 약사]</ref>.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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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 시절 ===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조 기록에는 봉성군의 집을 짓는 일로 인해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 그 공사가 중지된 내용과<ref>《조선왕조실록》중종 91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6월 22일(무오) 2번째기사</ref>, 봉성군이 부리던 종 효림(孝林)이종이 다른 집의 종과 싸운 일 등만 기록되어 있고 봉성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ref>《조선왕조실록》중종 94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嘉靖) 19년) 10월 24일(임오) 2번째기사</ref>. 한편 봉성군은 정랑(正郞)을정랑을 지낸 [[동래 정씨]] [[정유인]](鄭惟仁)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 혼인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1545년]](인종 원년)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ref>《조선왕조실록》인종 1권, 1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1월 24일(무오) 3번째기사</ref>.
 
[[1545년]](인종 원년, 명종 즉위년)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요절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이 해 [[음력 9월 1일]] 당시 [[경기도]] [[관찰사]]로 있던 [[김명윤 (조선)|김명윤]](金明胤)이 역모를 고변하였는데, 그 내용은 인종의 외숙이 되는외숙부 [[윤임]]이 경원대군(명종) 대신 [[계림군]](桂林君)<ref>[[조선 성종|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여필]]의 외손자이다. 따라서 윤임은 계림군의 외숙이 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805&mobile&categoryId=200001080 두산백과 〈계림군〉] 참고</ref>이나 나이가 어린 봉성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명종은 계림군에 대해서는 잡아들일 것을 지시했으나, 봉성군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특별히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여 우선 신문하지 말라고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일(신유) 3번째기사</ref>. 당시 이 역모를 고변한 김명윤은 봉성군의 이모부였는데, 명종 즉위 후 권력을 잡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 윤씨]]와 그 누이 [[윤원형]] 및 [[이기 (1476년)|이기]](李芑) 등에게 아부하기 위해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다<ref name="isshi"></ref>. 이른바 [[을사사화]]의 시작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805&mobile&categoryId=200001080 두산백과 〈계림군〉]</ref>.
 
그러나 고변 5일 후인 [[음력 9월 6일]]부터6일부터 시작된 관련자들에 대한 공초에서 지속적으로 봉성군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종의 외숙부인 윤임이 인종이 죽으면 질병이 있는 경원대군(명종) 대신 계림군 혹은 봉성군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면 그 외숙 [[윤원로]] 등이 득세하여 반드시 자신의 집안은 멸문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며, 계림군 혹은 봉성군을 세우면 명종을 축출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3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9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13번째기사</ref>.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인해 봉성군은 수 차례에 걸쳐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종은 계속해서 봉성군에 대해 나이가 어려 보호해주고자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1일(신미) 6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8일(무인) 1번째기사</ref>. 한편 봉성군의 생모 희빈 홍씨는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면서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 대궐에서 나와 사가로 돌아가기도 하였다돌아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21일(신사) 5번째기사</ref>. 그러나 이후에도 대간들의 봉성군 탄핵은 계속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10월 9일(무술) 2번째기사</ref>, 결국 봉성군은 이듬해인 [[1546년]](명종 원년) [[음력 9월 12일]] [[강원도]] 울진(蔚珍)<ref>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43557&mobile&categoryId=2453 네이버 지식백과 〈울진군〉] 참고</ref>으로 귀양을 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12일(병인) 3번째기사</ref>.
 
그러나 봉성군이 유배를 가던 도중 평창에서 병에 걸려 그곳에서 머물러 있음을<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27일(신사) 2번째기사</ref> 알게 된 명종은 그 유배지를 평창(平昌)<ref>지금의 [[강원도]] [[평창군]]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65698&mobile&categoryId=2252 네이버 지식백과 〈평창군〉] 참고</ref>으로 옮겼고, 약과 의원을 보내어 이를 치료하게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28일(임오) 5번째기사</ref>.
 
=== 정미사화 ===
 
봉성군이 유배를 떠나고 1년이 지난 [[1547년]](명종 2년) [[음력 9월 18일]], 부제학으로 있던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한강]] 이남의 양재역(良才驛)<ref>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인근이다인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04113&mobile&categoryId=2275 네이버 지식백과 〈양재역〉] 참고</ref>에서 한 장의 익명서를 발견하고 이를 명종에게 고하였다. 당시 익명서에는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 이라는 내용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며,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로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 칭하기도 한다<ref name="Yangjae">《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9월 18일(병인) 3번째기사</ref><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0414&mobile&categoryId=200000329 두산백과 〈정미사화〉]</ref>. 당시 이 사건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이한우
|제목=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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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윤원형 일파는 애초에 윤임 등의 역모를 다스릴 때에 그 처벌을 가벼이 했기 때문이라고 간하고, 이어 윤임 일파는 물론이고 봉성군에 대해서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명종은 [[계림군]]에 대해서만 사사할 것을 명하였는데, 당시 이 사건을 《[[조선왕조실록|실록]]》에 기록한 사관은 [[이기 (1476년)|이기]] 일파가 자신들의 반대파인 윤임 일파를 역적으로 몰아버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봉성군마저 죽일 것을 간한 것은 너무 심한 처사라며 비판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9월 18일(병인) 3번째기사</ref>. 그러나 이후에도 봉성군을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으나, 명종은 전혀 윤허하지 않았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윤9월 4일(임오) 3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윤9월 14일(임진) 4번째기사</ref>.
 
한편 당시 [[홍문관]]에 재직 중이던 [[이황|퇴계 이황]]도 봉성군을 죽이라는 [[차자]]를 올렸다고 그 제자가 증언하기도 하였다증언하였다<ref>{{뉴스 인용
| 제목 = 2003년 古書 한권이 발견됐다… 그러나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다
| url = http://news.donga.com/3/all/20120209/43896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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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과 평가 ===
 
한편 [[1547년]](명종 2년) [[음력 9월 16일|음력 윤9월 16일]] 당시 [[영의정]]이던 [[윤인경]] 등과 [[육조]]에서 봉성군을 죽이라고 또 간하였다. 결국 명종은 이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봉성군에 대해 자진하라는 명을 내리고 말았다. 이때 봉성군의 나이 20세였다. 당시 자진 명령을 전달받은 봉성군은 목욕을 하고 곧바로 자살했다고 한다<ref name="wan">《조선왕조실록》명종 6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윤9월 16일(갑오) 4번째기사</ref>.
 
봉성군은 [[조선 선조|선조]] 즉위 후인 [[1567년]](선조 즉위년) [[음력 10월 15일]]에서야 그15일에야 관작이 신원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선조 1권, 즉위년(1567 정묘 / 명 융경(隆慶) 1년) 10월 15일(병신) 1번째기사</ref>. 그리고 150여 년이 지난 [[1732년]](영조 8년) [[음력 5월 18일|음력 윤5월 18일]]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의민(懿愍)의 [[시호]]가 올려졌다.
 
봉성군에게 자진 명령이 떨어진 날의 《[[조선왕조실록|실록]]》에서는 봉성군에 대해 "총명하고 중종의 왕자들 중 가장 현명했던 바람에, 을사년에 가장 참혹한 화를 만났다. 또 역도들이 봉성군을 내세우기는 하였으나 정작 봉성군이 직접 한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다. 봉성군은 왕의 지친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죽이라고 해도 보호했어야 하는데, 이때 자진하라고 하였으니 사실은 죽인 것이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면 '공자 완(岏)을 죽였다.'고 썼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ref name="wan"></ref>.
 
현재 봉성군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다<ref name="isshi"></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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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태봉산]](胎封山)의 이름은, 이 산의 정상에 봉성군의 [[태실]]을 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름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일부 기록상에서만 그 태실이 묻혔음을 확인할 수 있다<ref>[http://chilgok.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301749 디지털칠곡문화대전 〈태봉산 태실〉]</ref>.
 
== 가족 관계 ==
 
봉성군은 정랑(正郞)을정랑을 지낸 정유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20세의 나이로 요절한 탓에 후사는 없었고, 부인 정씨가 [[문성군]](文城君)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그 후사를 잇게 했다<ref name="isshi"></ref><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6899&mobile&categoryId=2970 《국조인물고》〈이세준〉]</ref>. 문성군은 성종의 아들 [[경명군]]의 증손자이며, [[1576년]](선조 9년) 정식으로 양자로 들어갔다<ref name="geon"></ref>.
 
문성군은 아들 둘을 낳았고, 이들로부터 자손이 퍼져 오늘날의 봉성군파를 형성하였다<ref name="isshi"></ref>.
 
* 친조부조부 : [[조선]]의 제9대 [[왕|국왕]] [[조선 성종|성종]](成宗, 1457~1494, 재위:1469~1494)
* 친조모조모 : [[정현왕후|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1462~1530)
** 아버지 : 조선의 제11대 국왕 [[조선 중종|중종]](中宗, 1488~1544, 재위:1506~1544)
* 외조부 : [[홍경주]](洪景舟, ?~1521)
** 어머니 : [[희빈 홍씨]](熙嬪 洪氏, 1494~1581)
*** 형 : [[금원군]](錦原君, 1513~1562)
** 장인어른 :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유인]] (鄭惟仁, 생몰년 미상)
*** 아내 : [[동래 정씨]](東萊鄭氏) 군부인 동래 정씨
**** 양자 : [[문성군]] (文城君, [[1560년]] 1560~ [[1623년]]1623)
**** 딸 : 전주 이씨 - [[청송 심씨]](靑松心氏) [[심충겸]](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에게 출가
**** 사위 : [[심충겸]]
***** 외손자 : [[심열]]
* 사돈 : 청릉부원군 [[심강]] - [[인순왕후]]의 아버지, [[조선 명종|명종]]의 장인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