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대프랑스 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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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동맹 ==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패권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 해상 봉쇄를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은 프랑스 지배가 현지 주민의 반감을 사서 각지에서 게릴라가 궐기하고 있었다. 영국은 [[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아서 웰즐리]]를 파견하여 스페인의 반란 세력을 지원했다. 소위 [[반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육지와 바다에서 나폴레옹이 차질을 빚는 것을 본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9년]] [[4월 9일]]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잃은 영토 탈환에 나섰다.
 
=== 제3차 대프랑스 동맹 (1804-1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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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전개 ==
==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
 
=== 에크뭘 전투 ===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오스트리아]]는 재기를 준비하며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테셴 공작 카를|카를 대공]]이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프랑스식의 군단 편성을 도입했다. 또한 기존의 용병 이외에, 독일계 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국군인 "국방군"(Landwehr)을 창설했다. 국방군 15,000명이 1809년 전쟁에 참가하여, 이후 24만 명의 군대로 발전한다.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20만 명의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 주|바이에른]]에 침공했다. 동시에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단이 [[바르샤바]] 공국에, 요한 대공의 군단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은 사전에 오스트리아군 동원을 감지하고 있었다. 총참모장 베르티는 즉시 [[라인 동맹]]에 주둔한 [[루이 니콜라 다부|다부]], [[우디노]],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르페브르]], 마세나 등의 부대를 동원했다. 나폴레옹 본인도 파리를 출발하여, [[4월 18일]]에는 전선인 [[잉골슈타트]]에 도착했다. 전선의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18만 명에 이르렀지만, 당시 프랑스군의 정예는 스페인에 있었고,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은 2선급 부대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분산 상태를 꿰뚫어보고 즉각 반격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주력 9만을 이끌고 [[4월 20일]] 아벤스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선봉을 돌파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다부에게 맡기고, 오스트리아 군 좌익을 추격하여 남하하였다. [[4월 21일]] 란츠 푸트로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깨고, 반전 북상하여 [[4월 22일]] [[에크뭘 전투]]에서 [[테셴 공작 카를|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격파했다. 카를 대공은 [[도나우 강|다뉴브 강]] 북쪽으로 퇴각했다.
 
=== 오스트리아의 선제 공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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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파 ==
[[10월 14일]], 《[[쇤브룬 조약]]》이 체결되고, [[오스트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할양하게 되었다. 또한 [[1810년]]에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가 프랑스의 황후가 되었다. 이 무렵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 등을 합병하고 [[프랑스 식민 제국|프랑스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이탈리아 왕국]],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왕위에 있는 [[스페인]],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가 왕위에 [[베스트팔렌 왕국]], 시동생인 [[뮈라]]가 왕위에 있는 [[나폴리 왕국]], 동맹인 스위스 연방, [[라인 동맹]], [[바르샤바 공국]]에 이르러, 나폴레옹의 절정기로 평가된다.
 
== 함께 보기 ==
 
== 주석 ==
 
== 참조문헌 ==
 
== 추가 참고도서 목록 ==
 
== 동맹 ==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패권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 해상 봉쇄를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은 프랑스 지배가 현지 주민의 반감을 사서 각지에서 게릴라가 궐기하고 있었다. 영국은 [[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아서 웰즐리]]를 파견하여 스페인의 반란 세력을 지원했다. 소위 [[반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육지와 바다에서 나폴레옹이 차질을 빚는 것을 본 [[오스트리아 제국]]은 [[1809년]] [[4월 9일]]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잃은 영토 탈환에 나섰다.
 
==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
=== 에크뭘 전투 ===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오스트리아]]는 재기를 준비하며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테셴 공작 카를|카를 대공]]이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프랑스식의 군단 편성을 도입했다. 또한 기존의 용병 이외에, 독일계 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국군인 "국방군"(Landwehr)을 창설했다. 국방군 15,000명이 1809년 전쟁에 참가하여, 이후 24만 명의 군대로 발전한다.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20만 명의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 주|바이에른]]에 침공했다. 동시에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단이 [[바르샤바]] 공국에, 요한 대공의 군단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은 사전에 오스트리아군 동원을 감지하고 있었다. 총참모장 베르티는 즉시 [[라인 동맹]]에 주둔한 [[루이 니콜라 다부|다부]], [[우디노]],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르페브르]], 마세나 등의 부대를 동원했다. 나폴레옹 본인도 파리를 출발하여, [[4월 18일]]에는 전선인 [[잉골슈타트]]에 도착했다. 전선의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18만 명에 이르렀지만, 당시 프랑스군의 정예는 스페인에 있었고,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은 2선급 부대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분산 상태를 꿰뚫어보고 즉각 반격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주력 9만을 이끌고 [[4월 20일]] 아벤스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선봉을 돌파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다부에게 맡기고, 오스트리아 군 좌익을 추격하여 남하하였다. [[4월 21일]] 란츠 푸트로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깨고, 반전 북상하여 [[4월 22일]] [[에크뭘 전투]]에서 [[테셴 공작 카를|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우익을 격파했다. 카를 대공은 [[도나우 강|다뉴브 강]] 북쪽으로 퇴각했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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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차 대프랑스 동맹]]
 
== 주석 ==
 
== 참조문헌 ==
 
== 추가 참고도서 목록 ==
== 바깥 고리 ==
{{위키공용분류|War of the Fifth Coal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