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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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다치다 ===
어느 날, 그가 10대일 때 의류점에 보내진 때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허가 없이 농장을 떠난 다른 집의 노예를 만났다. 그 노예의 관리자는, 터브먼에게 그를 잡아둘 것을 요구하였다. 그가 이를 거부하고, 노예가 도망치자, 관리자는 그를 잡기 위해 2파운드짜리 물건을 던졌다. 그러나 그 물건은 빗나가 터브먼을 맞췄다.<ref name="Lar42">Larson, p. 42.</ref> 이후 그는 “한 번도 빗질한 적 없고... 양동이처럼 서있던” 머리카락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 같다고 말하였다.<ref name="Lar42"/> 의식을 잃고 피를 흘리는 상태로 주인의 집으로 돌려보내진 터브먼은, 베틀 의자에 누워 아무런 의학적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이틀간 방치되었다.<ref name="Lar42"/> 이후 그는 즉시 밭으로 다시 내보내졌으며, “보지도 못할 정도로 피와 땀이 얼굴로 흘러내리는” 상태였다.<ref name="Lar42"/> 그의 주인은 그가 “6펜스어치도 되지 않는다.”라며 그를 브로디스에게 다시 보냈으며, 이후 브로디스는 그를 파는 데 계속 실패하였다.<ref name="Cli22">Clinton, p. 22.</ref> 이후 그는 발작을 일으키고 의식을 잃곤 하였으나, 그는 그 상태에서도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곤 했던 그는, 가족들에게는 매우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신체 상태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훗날 라슨은 그가 그날의 사건으로 [[측두엽]] 발작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였다.<ref name="korq"/><ref>Larson, pp. 42–43.</ref><ref name="korq2"/>
=== 기독교로부터 영향을 받다 ===
한편 이때쯤 그는 기독교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문맹이었던 그는, 어머니로부터 [[성서]]이야기를 듣곤 하였다.<ref>Clinton, p. 20.</ref> 초기에 그가 [[기독교]]의 어느 종파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터브먼은 하나님에 대해 깊은 믿음을 유지하였다. 그는 [[노예]]들에게 백인인 주인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데 이용되었던 “백인의 성서”<ref>백인의 성서는 백인과 흑인이 읽는 성서가 달랐다는 뜻이 아니라, [[백인]]인 [[개신교]] 목사나 [[전도사]]들이 [[예배]]나 순회[[설교]]때마다 성서에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내용만 찾아서 가르쳤다는 뜻이다. 성서는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교리]] 즉, [[축자영감설]]에 기반을 두어 [[노예제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백인 성직자들이 성서를 노예제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한 사례는 《두 얼굴을 한 하나님, 성서로 본 노예제》([[살림]])참조</ref> 을 거부하였으며, 야훼가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한 이야기인 [[구약 성서]]의 [[출애굽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뇌 손상을 입은 후, 터브먼은 여러 환각과 선명한 꿈을 경험하였는데, 그는 이를 하나님이 내리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이런 종교적인 관점은 그를 평생 이끌었다.<ref>Larson, p. 4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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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 계급에서 벗어나다 ==
=== 하나님, 악한 주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시오 ===
[[1849년]], 터브먼은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노예로서 가치도 떨어졌다. 에드워드 브로디스는 그를 팔려고 하였지만, 구매자를 찾을 수 없었다.<ref>Larson, p. 72.</ref> 이렇게 자신을 팔아 넘기려 하는 주인의 지속된 시도와 자신의 친척들에 대한 부당한 소유권 행사에 분노를 느낀 터브먼은, 주인이 마음을 바꾸도록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ref>Clinton, p. 31.</ref>
{{인용문2|"밤새도록 주인 때문에 기도를 했다. 기도는 3월 1일까지 이어졌는데, 그때까지 내내 그는 사람들을 데려와 나를 소개하며 팔아넘기려 했다."<ref name="QBra14-15">Bradford에서 발췌 (1971), pp. 14–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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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rriet Tubman Reward Notice 1849.jpg|thumb|left|250px|캠브릿지 “민주당”에 오른, 아라민타 (민티)와 그의 형제 헨리와 벤에 300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공고]]
=== 탈출하다 ===
터브먼과 그의 형제 벤, 헨리는 1849년 9월 17일 탈출하였다. 터브먼은 당시 캐롤라인 카운티에서 포플라 넥이라는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던 앤서니 탐슨 박사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의 형제도 거기서 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예들이 다른 곳에 가 일하고 있었던 관계로, 일라이자 브로디스는 처음에는 그들의 탈출 사실을 못 알아챈 것 같다. 하지만 2주 후, 그는 캠브릿지 “민주당”에, 노예 셋 중 하나를 잡을 때마다 100달러를 주겠다는 현상금 [[포스터]]를 내걸었다.<ref>Larson, p. 78.</ref> 터브먼의 두 형제는 또 나름대로 떠난 후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벤은 아버지가 막 된 참이었으며, 둘은 결국 앞에 놓인 위험에 겁을 먹고 스스로 다시 돌아갔다. 그로 인해 터브먼도 그들과 함께 돌아가야만 했다.<ref>Larson, pp. 78–79.</ref>
 
얼마 안 가 터브먼은 이번에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였다.<ref name="Lar80">Larson, p. 80.</ref> 그는 탈출하기 전, [[어머니]]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려하였다. 그는 믿음직한 친구였던 매리를 찾아, 암호처럼 쓰이던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아침에 보자꾸나, 나는 약속된 땅으로 간다."<ref name="QBra19">Bradford (1971), p. 19.에서 인용</ref>
=== 지하철도 ===
그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터브먼은 ‘[[지하 철도]]’(Undergraund)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광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였다. 이 비공식적이지만 잘 짜여진 조직망은 자유 흑인, 백인 노예 폐지론자, 그리고 기독교인 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기독교]] [[공동체]]로는 종종 [[퀘이커]]라 불리는 [[친우회]] 조직이 있었다.<ref name="Lar80"/> [[퀘이커]]와 [[메노나이트]] 교회는 미국 [[개신교]] 교회에서 마이너리티였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회]]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콘텍스트]]적(상황적)해석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교회였고, [[노예제]]에 대해서도 성서의 [[인권]]사상에 근거하여 투쟁했다.<ref>《두 얼굴을 한 하나님,성서를 통해서 본 노예제》(김형인,살림)</ref>
[[캐롤라인 카운티]]의 포플라 넥 근처의 프레스턴 지역은 퀘이커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으므로, 터브먼이 탈출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경유해간 지점이라 생각된다.<ref>Larson, p. 81.</ref> 그곳에서 그는 도주 노예들이 일반적으로 택하는 길을 따라갔다: [[촙탱크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델라웨어]]를 지나 [[펜실베이니아]]로 북쪽으로 간 것이다.<ref name="korq2"/><ref name="Cli37">Clinton, p. 37.</ref> 145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여행은, 도보로만 갈 경우 최소 5일에서 최대 3주까지 걸리는 길이었다.<ref>Clinton, p. 38.</ref>
=== 여러동지들의 도움 ===
여행의 위험한 조건 때문에 터브먼은 밤에만 움직이면서 ([[북극성]]을 길잡이로 잡아) “노예사냥꾼”들의 눈을 피해야했다.<ref>Clinton, pp. 37–38.</ref> 지하 철도의 “차장”은 숨어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변장을 썼다. 예를 들어 초반의 ‘정거장’ 중 하나에선, 집주인이 터브먼에게 마당을 쓸라고 말하여 마치 터브먼이 그 집의 노예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밤이 오면, 가족은 그를 카트에 숨겨 다음 집으로 옮겨주었다.<ref>Larson, p. 83.</ref> 그가 그 지역의 숲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낮에는 숲 속에 숨었을 가능성도 있다.<ref name="Cli37"/> 그가 택한 경로는 다른 노예들도 탈출시 이용하는 경로이므로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터브먼은 이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야기했다.
=== 자유에 대한 경험 ===
그의 첫 여행 중 몇몇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다.<ref>Larson, p. 82.</ref> 안도감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펜실베이니아를 건넌 그는 몇 년 후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였다.<ref name="korq2">{{뉴스 인용|제목=노예들의 모세로 불렸던 여성, 해리엇 터브먼|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7&aid=0000001284|저자=정희원|날짜=2005-12-06|출판사=여성주의 저널 일다}}</ref><ref name="QBra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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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 ==
=== 가족들을 생각하다 ===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후, 터브먼은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터브먼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낯선 땅에 있는 낯선 사람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와 누이, 친구들 모두 메릴랜드에 있었다. 나는 자유였고, ''그들'' 도 자유로워야 할 권리가 있었다.<ref>Bradford (1971), p. 20.에서 인용</ref> 터브먼은 돈을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다.<ref>Larson, p. 88.</ref> 그때, [[미국 의회|국회]]에서는 [[도망노예법]]이 통과되어 전국의 사법관들이 (노예 제도가 불법화된 주에서도) 탈출 노예를 잡는 것을 돕고, 탈출을 돕는 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 때문에 탈출 노예들의 위험은 증가하였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캐나다]]로 발을 돌렸다.<ref>Clinton, p. 60.</ref> 한편 필라델피아 역시 도시가 확장되면서 인종차별로 인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ref>Clinton, pp. 49–53.</ref>
=== 가족을 구하러 가다 ===
[[1850년]] 12월, 터브먼은 그의 조카 케시아가 그의 두 자식과 함께 캠브릿지에서 팔릴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받았다. 자신의 가족이 더욱 조각나는 현실에 충격을 받은 터브먼은, 다른 노예들은 거의 하지 못하는 일을 감행하였다: 자신이 원래 살던 땅으로 자발적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우선 [[볼티모어]]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매부 톰 터브먼이 그를 숨겨주었다. 존 볼리라는 케시아의 남편은 자유 흑인이었는데, 경매에서 자신의 아내를 사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돈을 내는 척하고 있을 동안, 케시아와 그의 자식들은 근처의 피난처로 도망쳤다. 밤이 오자, 볼리는 가족을 [[통나무배]]에 태우고 100킬로미터를 여행해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터브먼을 만났으며, 안전하게 필라델피아로 갈 수 있었다.<ref>Larson, pp. 89–90.</ref>
=== 나머지 가족들을 구하려 하다 ===
다음 봄, 그는 메릴랜드로 돌아와 나머지 가족들을 빼내려는 결심을 하였다.<ref name="korq2"/> 두 번째 여행에서 그는 자신의 형제 모세와 다른 두 명의 노예를 구해냈다.<ref name=Larson90>Larson, p. 90.</ref> 이때 터브먼은 [[윌밍턴 (델라웨어 주)|윌밍턴]]의 노예 폐지론자 퀘이커 교도 토머스 가렛과 함께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f>Clinton, p. 82.</ref> 그의 업적을 듣고 그의 가족은 용기를 냈으며, 실제 오늘날의 전기 작가들도 그가 메릴랜드로 올 때마다 더욱 자신감이 커졌을 거라 말하고 있다.<ref name=Larson90/><ref>Clinton, p. 80.</ref> 더 많은 사람들을 노예 제도에서 구출해내면서, 그는 “모세”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해방의 하나님이신 [[야훼]]의 뜻에 따라 하비루 즉, [[이집트]]에서 억압과 착취를 받던 [[민중]]을 해방한 것에 빗댄 것이다.<ref>Clinton, p. 85.</ref>
=== 동지들 ===
[[1879년]] 작가 윌버 시버트와 한 인터뷰에서, 터브먼은 그가 지하 철도에서 사용하였던 장소와 도우미의 이름을 일부 밝혔다. 그는 메릴랜드의 자유흑인 샘 그린 목사와 함께 지냈었다; 또 포플라 넥에 있는 그의 부모의 집 근처에도 숨었었다. 거기서 동북쪽으로 가 델라웨어의 샌드타운과 윌로우 그로브를 거쳐, 자유 흑인 요원 윌리엄 브링클리, 냇 브링클리와 에이브러험 깁스가 있는 캠든에 도착하였다. 세 요원은 그를 도버와 블랙버드 지역을 지나 북쪽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다른 요원들은 체사피크와 델라웨어 운하를 지나 뉴캐슬과 윌밍턴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윌밍턴에선, 퀘이커 교도 토머스 가렛이 윌리엄 스틸의 사무실이나 다른 지하 철도 차장의 집으로 그를 안전히 데려다주곤 하였다. 유명한 흑인 요원이었던 스틸은 수백 명의 노예들을 뉴욕, 뉴잉글랜드와 캐나다 쪽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준 업적이 있는 사람이다.<ref>Larson, p. 134-135.</ref>
=== 도체스터 카운티 ===
[[1851년]] 가을, 터브먼은 자신의 남편 존을 찾기 위해, 탈출 후 처음으로 [[도체스터 군 (메릴랜드 주)|도체스터 카운티]]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는 다양한 직업으로 돈을 모아 그를 위한 정장을 한 벌 산 후 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시 캐롤라인이라는 여자와 재혼한 상태였던 존은,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하며 함께 떠나기를 권하는 터브먼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터브먼은 한때 그들의 집에 쳐들어가 소동을 벌일 생각까지 했으나, 결국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였다. 분노를 억누르면서, 그는 탈출을 원하는 또 다른 몇몇 노예들을 찾아 그들을 필라델피아로 데려갔다.<ref>Larson, pp. 90–91.</ref> 한편 존은 16년 후 로버트 빈센트라는 백인과 길가에서 말다툼을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ref name="Larson">Larson, p. 239.</ref>
 
[[파일:Frederick Douglass portrait.jpg|thumb|right|250px|[[프레더릭 더글러스]]: 터브먼과 함께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일하면서 그를 칭송하는 글을 씀]]
=== 캐나다 ===
탈출노예송환법으로 미국 북부가 탈출 노예들에게 위험한 지역이 되었기에, 많은 탈출자들이 더 안전한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다. 1851년 12월, 터브먼은 11명의 탈출 노예들을 북쪽으로 이끌었는데, 이 그룹에는 볼리 가족과 이전에 탈출을 도와주었던 많은 이들이 포함되어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과거 노예이자 노예 폐지론자였던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집에 머물렀다는 증거도 있다.<ref name="Cli84">Clinton, p. 84.</ref> 더글러스는 "한때 내 집에는 11명의 노예가 머물렀던 때도 있었으며, 그들이 캐나다로 가기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 그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내 의무였다. 한번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로는 그게 최대였으며,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음식과 잘 곳을 제공해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라고 썼다.<ref>Douglass, p. 266.</ref> 여행자의 수와 시기를 따져보면 이것이 터브먼의 그룹이었을 확률이 높다.<ref name="Cli84"/>
=== 상호존중 ===
더글러스와 터브먼은 함께 노예 제도에 맞서 싸우면서 서로에 대해 존중을 아끼지 않았다. 터브먼의 초기 전기가 1868년에 출간되자, 더글러스는 그를 기리는 편지를 썼다.<ref>Bradford (1961), pp. 134–135에서 증쇄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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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통한 노예 구출 방법 ===
{{인용문3|right|그는 항상 밤이 길고 어두운, 사람들이 밖에 잘 나다니지 않는 겨울에 우리를 찾아왔다.<ref>Clinton, p. 85.에서 인용</ref>|터브먼을 따르는 사람 중 한 명}}
=== 계획 ===
터브먼은 11년간 메릴랜드 주 동부로 수 차례에 걸쳐 돌아왔으며, 13번의 여행을 통해 70여 명의 노예를 구출했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 헨리, 벤, 로버트와 그들의 아내 및 자녀 일부도 포함되어있었다. 또 약 50-60명의 탈출 노예들에게는 북쪽으로 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ref name="13-70">Larson, p. xvii.</ref> 그의 이러한 노예 구출 활동은 당시에 매우 위험한 행위였으므로,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이끄는 여행자 그룹이 발견될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보통 겨울에만 주로 움직였다. 또한 탈출자들을 빼내올 때는 항상 토요일 저녁에 마을을 빠져나왔는데, 이것은 신문이 월요일 아침까지는 수배서를 싣지 않기 때문이었다.<ref>Larson, p. 100.</ref>
=== 지혜 ===
그의 여행은 그를 종종 엄청난 위험에 빠뜨렸으며, 그때마다 그는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위험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한 번은 그가 [[보닛]]을 쓰고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들고 심부름을 가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앞에 그의 과거 주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터브먼은 닭의 다리에 묶여있던 끈을 당겨 소동을 벌였으며, 이를 통해 과거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ref name="korq2"/><ref>Clinton, p. 89.</ref> 언젠가는 다른 옛 주인이 같은 기차에 올라탄 적도 있었다. 이때 그는 근처에 있는 신문을 빼들고 읽는 척을 하였다. 터브먼은 문맹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는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ref>Larson, p. 12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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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로의 거듭되는 여행에 있어 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머리 손상으로 인한 환각은 계속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는 종종 “하나님과의 대화”를 언급하였으며, 그분이 자신을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ref name="Cli91">Clinton, p. 91.</ref>
 
=== 암호 ===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또 다른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는 [[찬송가]]를 암호로 사용해, 위험한 길 또는 안전한 길을 동반 여행자들에게 알려주곤 하였다.<ref>Larson, p. 101.</ref>
=== 용감함 ===
그는 [[리볼버]]를 들고 다녔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여행에 따라나선 사람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쏴버리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ref name="korq2"/><ref>Clinton, pp. 90–91.</ref> 한때 터브먼이 이끌던 어느 탈출자 그룹의 사기가 저하되어, 한 사람이 계속 [[플랜테이션]]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겼던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계속 가거나 죽거나예요."<ref>Conrad, p. 14에서 인용</ref> 그런 일이 있은지 수 일 후, 돌아가겠다고 했던 사람은 무사히 나머지 그룹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하였다.<ref name="Cli91"/> 터브먼이 권총을 들고 다녔던 것은 아마도 주변에 상존했던 노예사냥꾼들과 그들의 사냥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탈하려는 탈출자들에게 권총을 겨누었던 것은 엄격한 지휘자로서 그의 결단력을 환기시켜 탈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의도였다.<ref name="korq"/><ref name="korq2"/> 한편 지역의 노예 주인들은 키 작고 몸도 편치 않았던 “민티”가 수많은 노예의 탈출을 도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1850년대 후반에 그들은 노예 도주를 돕고 있는 사람이 어떤 북부 출신 백인 노예 폐지론자라 의심하기도 하였다. 또 존 브라운이 동부 해안으로 와 노예들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 현상금 ===
일설에 따르면 터브먼에게 40,000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868년 남북 전쟁 이후 연금 지급시, 전 노예 폐지론자였던 샐리 홀리가 노예 주인들이 터브먼에게 줄 돈으로 4만 달러는 부족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ref>Larson, p. 241.</ref> 그런 높은 액수는 전국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400달러면 작은 농장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 시기의 어떤 신문에도 그 정도의 현상금을 내건 수배서는 실리지 않았다.<ref>링컨 대통령 암살 시 [[존 윌크스 부스]]의 공범을 수배하며 정부가 내건 현상금도 25,000달러에 불과했다.</ref> 12,000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말도 있었으나, 이 또한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다. 캐서린 클린턴은 40,000달러라는 액수가 그 당시 지역에서 내걸렸던 다양한 현상금을 모두 합친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였다.<ref name="Cli131">Clinton, p.131에서 인용</ref>
=== 잡히지 않다 ===
노예 주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터브먼은 잡히지 않았고, 그가 이끈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후, 그는 청중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지하철도의 차장으로 8년을 일했으며, 대부분의 차장이 못 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 제 기차는 한 번도 탈선한 적 없으며, 손님을 놓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ref>Clinton, p. 192에서 인용</ref> 그가 메릴랜드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 중 하나는 그의 노부모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벤은 1855년 일라이자 브로디스로부터 20달러에 그의 어머니 릿을 샀다.<ref>Larson, p. 119.</ref> 그러나 둘 다 자유가 된 이후에도, 그 지역에서 그들에 대한 반감은 커져있는 상태였다. 2년 후, 터브먼은 그의 아버지가 8명의 노예의 탈출을 돕다 체포될 위험에 놓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부 해안으로 여행해 그를 구출하여, 먼저 탈출한 노예들 (터브먼의 형제 및 다른 친척들과 친구들 포함)이 마을을 꾸려 살고 있던 캐나다 [[온타리오 주]] [[세인트 캐서린스]]로 데려다주었다.<ref>Larson, pp. 143–144.</ref>
 
== 존 브라운과 하퍼스 페리 ==
=== 존 브라운 ===
[[1858년]] 4월, 터브먼은 노예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노예 폐지론자이자 반정부 운동가인 [[존 브라운]]을 소개 받았다. 터브먼은 백인에 대한 폭력을 옹호한 적은 없으나, 그는 그의 직접적인 행동 방식에 동의를 하며 그의 목표를 지지하였다.<ref name="Cli129">Clinton, p. 129.</ref> 터브먼처럼, 그도 하나님의 부름에 관해 말하였으며, 노예 주인들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다. 한편 그는 이미 그들이 만나기 전에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ref>Larson, pp. 158–159.</ref>
=== 터브먼 장군 ===
곧 그는 노예 소유자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지지자를 모았고, 여기에는 터브먼도 참여했다. 당시 터브먼은 “터브먼 장군” (존 브라운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ref name="Cli129"/> 그의 지지 세력들에 관한 정보와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델라웨어의 주 경계의 자원에 대한 정보는 브라운이 계획을 짜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등의 다른 노예 폐지론자들은 그의 계획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브라운은 자유 흑인들이 모인 새로운 주를 만드는 꿈을 갖고 군사적인 행동 개시를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그는 일단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면 다른 노예들도 이에 호응하여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반란이 확장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ref>Clinton, pp. 126–128.</ref> 당시 캐나다에 살고 있던 자유 흑인들 중 그의 군대에 참여할 이가 없는지 찾아봐달라는 브라운의 요청에 따라 그는 캐나다 지역에서 지원자를 찾았다.<ref>Larson, p. 159.</ref>
=== 자금 ===
1858년 5월 8일, 브라운은 온타리오 주 채텀-켄트에서 [[버지니아 주]] 하퍼스 페리 습격 계획을 털어놓았다.<ref>Larson, p. 161.</ref> 이 계획이 정부에 노출되자, 브라운은 잠시 계획을 보류하고 훗날의 거사를 위해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터브먼은 그를 도우면서 공격 계획을 좀 더 구체화시켰다.<ref>Larson, pp. 161–166.</ref>
=== 연설 ===
터브먼은 당시 노예 폐지론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859년]] 가을,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이 공격 개시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터브먼은 참여하지 못하였다.<ref name="Cli132">Clinton, p. 132.</ref> [[10월 16일]] 하퍼스 페리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몇몇 역사가들은 그때 그가 [[뉴욕]]에서 열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ref name="Cli132"/> 한편으로는 그가 [[캐나다]]에서 군대 지원자들을 더 모으고 있었다는 설도 있으며,<ref>Humez, p. 39.</ref> 케이트 클리포드 라슨은 그가 메릴랜드에서 군대 지원자를 모으거나 또는 다른 가족들을 더 구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을 것임을 주장했다.<ref name="Lar174">Larson, p. 174.</ref> 라슨은 또 [[프레더릭 더글러스]]처럼 터브먼도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Lar174"/>
 
=== 처형 ===
공격은 실패였다. 브라운은 [[반역죄]]로 12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훗날 그의 행동은 많은 노예 폐지론자들에게 저항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는 숭고한 순교자로 기억되었다.<ref>Clinton, pp. 134–135.</ref> 터브먼 역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친구에게 “그는 죽음으로써 100명의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하였다."라 말하였다.<ref>Larson, p. 177에서 인용</ref>
 
== 오번과 마가렛 ==
=== 1200달러를 손에 넣다 ===
[[1859년]] 초, 노예 폐지론자인 [[윌리엄 H. 수어드]]상원의원이 터브먼에게 [[뉴욕 오번]] 외곽에 있는 작은 땅을 1200달러에 팔았다.<ref>Larson, p. 163.</ref> 그 도시는 반노예주의의 온상이었으며, 터브먼은 그의 부모를 캐나다의 혹한으로부터 데리고 나왔다.<ref name="Cli117">Clinton, p. 117.</ref> 미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도망노예송환법에 의해 그들이 남부로 다시 송환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었으며, 터브먼의 형제들 역시 거부감을 보였다. 캐서린 클린턴은 [[드레드 스콧 판결]] 사건으로 인한 분노가 터브먼을 미국으로 다시 데려온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Cli117"/> 오번의 그의 지역은 터브먼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몇 년간, 그는 친척들과 다른 흑인들을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주었다.<ref name="Larson"/>
=== 마가렛 ===
오번 땅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터브먼은 메릴랜드로 가 그의 “조카”인, 마가렛이라는 8살 난 흑인 소녀를 데리고 왔다.<ref name="Cli117"/> 이 여행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미스터리에 쌓여있다. 마가렛의 부모에 관한 것도 일치되는 이론은 없으나, 터브먼은 그들이 자유 흑인이었다고 말하였다. 마가렛은 메릴랜드에 자신의 집과 쌍둥이 오빠를 두고 오게 되었다.<ref>Larson, p. 197.</ref> 몇 년 후, 마가렛의 딸 앨리스는 터브먼의 행동을 이기적이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안전한 집에 있던 소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다놓았다.”<ref>Quoted in Clinton, p. 119.</ref> 실제로, 앨리스는 이 일을 “납치”라고 표현하였다.<ref>Larson, p. 197에서 인용</ref>
 
하지만, 클린턴과 라슨 둘 다 마가렛이 사실은 터브먼의 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ref name="Cli121">Clinton, p. 121.</ref><ref>Larson, pp. 198–199.</ref> 라슨은 둘의 연결고리가 굳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진 아이의 고통을 아는 터브먼이 자유 흑인 가족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ref>Larson, p. 199.</ref> 클린턴은 둘의 닮은 외모를 근거로 들었으며, 이는 앨리스도 인식한 사실이다.<ref name="Cli121"/> 두 역사가 다 그런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데 동의하며, 터브먼과 마가렛의 관계에 관한 미스터리는 현재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ref>Larson, p. 202.</ref>
=== 마지막 구출미션 ===
1860년 11월, 터브먼은 마지막 구출 미션을 감행하였다. 1850년대 동안은 터브먼은 그의 누이 레이철과 그의 두 자식 (벤과 앤저린)을 구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도체스터 카운티에 돌아와, 터브먼은 레이철이 죽었으며, 두 아이들은 30달러의 뇌물이 있어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겐 돈이 없었기에 아이들은 노예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후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여행을 헛되이 끝낼 수는 없었으므로, 터브먼은 에널 가족 등의 다른 그룹을 모아, 북쪽으로의 여행을 감행하였다. 노예 사냥꾼들에게서 벗어나는 데는 몇 주가 걸렸으며, 이는 그들의 예상을 웃도는 것이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음식은 얼마 없었다. 순찰대가 가까이 올 때면, 아이들은 [[진통제]]를 먹여 조용하게 해야 했다. 그들은 안전하게 오번에 있는 데이빗과 마사 코핀 라이트의 집에 1860년 12월 28일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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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20년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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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노예 제도 폐지론자]]
[[분류:아프리카계 미국인]]
[[분류:가나계 미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