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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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량 해전 ==
[[File:Location Chilcheonryang.png|thumb|칠천량의 위치]]
[[1597년]] [[8월 16일]]([[음력 7월 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ref>조선 수군의 지휘관은 원균이었다. 원균도 이 싸움이 조선에게 불리하고 참패할 것을 우려했지만 조정의 무리한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감행한다. 원래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유는 적진에 들어가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적선을 자기 진영에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일본 수군의 전력을 조금씩 상대하는 전투였다. 사실상 조선 수군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그런데 1,000여척에 달하는 적진에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동했을 때 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초동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해서 요시라가 직접 와서 포로들을 풀어주며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고성 지역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통제사 원균과 중군장 순천부사 [[우치적]]은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 (조선)|배설]]은 전선12척을 이끌고 도망을 친다.[[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완은 진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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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사 [[최호 (조선)|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황하여 도망칠 궁리만 한 원균과 달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에 있는 군수물품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을 쳤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 <ref>《사대문궤》에 따르면 5척</ref> 을 포함하여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초기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역시 왜인들의 말을 빌어 칠천량에 정박한
=== 결과와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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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함선이 소실되고, 남해안의 제해권이 왜군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바람에 육군의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전라도까지 왜군이 침입하였다. 이때 뺏긴 남해안의 제해권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왜군에게 있었다.
[[1597년]] [[8월 30일]]([[음력 7월 18일]]) 이순신은 해안 지역을 직접 돌아본 후 대책을 마련한다고 권율에게 요청하고 [[송희립]] 등 9명의 군관과 함께 현지로 출발한다. [[삼가]], [[단성]], [[진주]]를 거쳐 [[9월 2일]]([[음력 7월 21일]]) 노량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을 만나 패전 상황을 듣고 대책을 논의한다.
== 인구 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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