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체 베아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이탈리아계 영국인; 예쁘게 바꿈
25번째 줄:
[[동아시아]]의 사진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작가 중 한 명이며, 또한 초기의 종군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상 사진, 초상화, 또한 [[아시아]]와 [[지중해]]의 풍경이나 건물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유명하다. 베아토는 여러 국가를 여행하며 그 나라 사람들, 사건을 촬영했으며, 멀리 떨어져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는 [[유럽]]과 [[북미]]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세포이 항쟁|인도 대반란]]과 [[제2차 아편 전쟁]]의 기록도 촬영했고, 초창기의 보도 사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는 다른 사진작가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매우 많은 사진작가, 예술가들에게 깊이 있고, 장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 생애 ==
베아토의 출신과 국적은 여러 가지 혼란이 있으며 사망 년도는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현재는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에 발견된 사망증명서에 따르면, 베아토는 1832년에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909년]] [[1월 29일]]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또한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그리스]]의 [[코르푸 섬]]에 이주한 보인다. 당시 [[이오니아 제도]]는 영국의 보호령이었기 때문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펠리체 안토니오 베아토(Felice Antonio Beato) 또는 펠리체 A. 베아토(Felice A. Beato)라고 서명된 사진이 다수 존재하는 한 명의 사진작가가 있을 때는 이집트, 어떤 때는 일본과 떨어진 장소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고 있었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1983년에 Chantal Edel에 의해 펠리체 안토니오 베아토(Felice Antonio Beato)는 펠리체와 동생 안토니오(Antonio Beato)의 이름을 연달아 쓴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때로는 함께 활동했고, 동일한 서명을 사용했다. 따라서 현재에도 펠리체가 촬영했는지, 안토니오가 촬영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 지중해, 크리미아, 인도 ==
[[파일:Image-Secundra Bagh after Indian Mutiny higher res.jpg|thumb|left|280px|alt=A photograph of the ruins of a palace with human skeletal remains in the foreground|시칸다르 정원 궁전의 폐허, 배경의 앙상한 반란의 흔적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1858년 인도]]
[[1854년]] 말 또는 [[1855년]] 초 로버트슨은 베아토의 여동생과 결혼해 3명의 딸을 낳았다. [[1855년]] 베아토와 로버트슨은 [[크림 반도]]의 [[발라클라바]]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크림 전쟁]]의 사진을 촬영했다. 1855년 말 [[세바스토폴]] 함락 시 60장 정도의 사진을 촬영했다.
38번째 줄:
[[1858년]] 7월에는 안토니오가 합류하였고, 건강상의 이유로 [[1859년]]에 인도를 떠나게 된 것 같았다. [[1860년]] [[이집트]]로 건너가 [[1862년]]에 [[테베]]에서 사진관을 열었다.
 
== 중국 ==
[[1860년]] 베아토는 ‘로버트슨 앤 비토’(''Robertson & Beato'')의 공동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로버트슨은 1867년까지 회사의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베아토는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사진 촬영을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3월에는 [[홍콩]]에 도착 즉시 [[광저우]]까지 다리를 펴서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이 때 펠리체가 촬영한 사진은 중국을 촬영한 가장 초기의 것들 중 하나였다.
 
홍콩에 머무는 동안 베아토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의 특파원으로 화가 [[찰스 워그먼]]을 만났다. 두 사람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동행하여 [[다롄 만]], 베이탕(北塘), [[하이허]] 하구의 [[다구포대]], [[베이징]], [[원명원]] 등의 사진을 촬영했다. 워그먼과 기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가 그린 삽화는 펠리체가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 다구포대 ===
[[파일:Upper North Taku Fort.jpg|thumb|280px|1860년 8월 21일,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점령한 직후의 다구포대]]
베아토가 촬영한 [[제2차 아편 전쟁]]의 사진은 군사 작전의 전개에 따라 순차적 사진을 찍은 최초의 사례였다. 다구포대 사진은 그 상징적인 사례였다. 사진에는 차례로, 포대에 접근하여 외벽과 요새에 대한 포격과 마지막으로 중국인의 시체를 포함한 파괴된 요새 내부가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진이 순서대로 촬영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시체를 정리되기 전에 촬영한 다음 터렛 내부와 외부를 촬영하였다. 앨범은 실제 전투를 재현할 수 있도록 정렬되어 있었다.
53번째 줄:
촬영된 사진은 영국 제국주의와 군사적 승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영국에서 베아토의 사진은 제2차 아편 전쟁과 다른 식민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대중에게 동양의 문화를 알렸다.
 
=== 이화원 ===
[[파일:Belvedere of the God of Literature, Summer Palace.jpg|thumb|약탈 직전의 이화원, 1860년 10월)]]
베아토는 [[베이징]] 교외에 있는 중국 황제의 사적공원이며, 건물, 사원, 인조 연못, 정원으로 구성된 이화원을 촬영하고 있다. 몇 장의 사진은 [[1860년]] [[10월 6일]]부터 18일 사이에 촬영되었다. [[10월 6일]]에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프랑스군이 값나는 모든 것을 약탈한 후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의 명령에 따라 ‘포로가 학대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영국군 제1사단이 철저히 파괴하였고, [[10월 18일]]과 19일에 방화를 했다. 베아토가 중국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은 [[베이징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엘긴 백작과 [[함풍제]]의 대리로 서명한 [[혁흔]]이었다.
59번째 줄:
1861년 11월, 베아토는 영국으로 돌아가 그 겨울 동안 [[인도]]와 [[중국]]에서 촬영한 400장의 사진을 런던의 상업 인물 사진작가인 헨리 헤링(Henry Hering)에게 매각했다. 헤링은 사진을 복제하고 판매했다. 가격은 사진 1장당 7실링이었고, 인도에서 촬영된 사진 전부가 54파운드 8실링, 중국에서 찍은 사진이 총 37파운드 8실링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일인당 국민 소득은 연간 32파운드에 불과했고, 사진집의 가격은 이보다 높았던 셈이다.
 
== 일본 ==
[[파일:Satsuma-samurai-during-boshin-war-period.jpg|thumb|left|[[보신 전쟁]] 중에 [[사쓰마 번|사쓰마 번사]]]]
베아토는 [[1863년]]경 [[요코하마]]로 이주하여 [[1861년]]부터 그곳에서 살고 있던 [[찰스 워그먼]]과 함께 ‘비토 앤 워그먼 화실’(''Beato & Wirgman, Artists and Photographers'')을 설립하여, [[1864년]]부터 [[1867년]]까지 같이 일했다. 워그먼은 여기에서도 베아토의 사진을 바탕으로 삽화를 그렸다. 한편, 베아토는 워그먼 스케치와 작품을 촬영하고 있었다. 원래 ‘일러스트 런던 뉴스’의 삽화 화가였던 워그먼이 1860년 베이징 전쟁 취재 중에 현지에서 알게 된 종군 사진작가인 베아토를 초청하여 [[1863년]]에 일본으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76번째 줄:
[[1884년]] [[11월 29일]], 베아토는 [[일본]]을 떠나 [[이집트]] 포트사이드에 정착했다. 일본 신문에 따르면 요코하마에서 은 거래에 실패하여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슈티르프리드 앤 안데르센’의 자산은 [[1885년]] 아돌포 파르사리와 구사가베 김베이에게 매각되었기 때문에, 베아토의 사진 자산은 파르사리 등에게 넘어갔다.
 
=== 일본의 풍광 ===
베아토의 대표작 〈일본의 풍광〉(''Views of Japan'')<ref>정식 명칭은 Photographic Views of Japan with Historical and Descriptive Notes, Compiled from Authentic Sources, and Personal Observation During a Residence of Several Years</ref>은 1868년부터 촬영된 것이다. 풍경을 주로 한 것과 인물 등 일본의 풍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 것, 두 종류가 있으며, 25매 ~ 50매 철의 사진집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 외에 고객(해외에서 여행객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상인 등) 자신이 내점하여 컬렉션 중에서 좋아하는 것을 골라 앨범으로 만드는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었다. 사진에는 ​​각각 150 ~ 500자 정도의 자막을 붙일 수 있었지만, 실수와 오해도 적지 않았다. 편집은 요코하마의 영자지(재팬 공보, ''The Far East'') 발행인인 존 레이디 블랙이 관계하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사진의 착색은 동종 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차별화를 위해, 수채화에도 (워그먼의 조언으로) [[우키요에]]를 만들던 수준 높은 기술을 익히고 있던 일본 장인이 작업에 나섰다.<ref name="repo2"/> 스튜디오 촬영 모델은 동일인이 다른 의상으로 등장하는 등 반드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ref name="repo2"/>
 
83번째 줄:
<div style="clear:both; height:1px">&nbsp;</div>
 
== 조선 ==
[[1871년]],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8월 21일]] 미국 상선이 [[대동강]]에서 소각된 사건)의 보복을 위해 [[미국 해군]]은 조선에 원정을 하여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베아토는 그곳에서도 종군 사진사로 있었다. 그때 촬영된 사진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 [[1871년]] [[9월 9일]]자를 통해 보도되었으며<ref>[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20508141109841 서양인이 찍고 그린 구한말 한국·한국인], [[문화일보]], [[2012년]] [[5월 8일]]</ref>, 확인되는 한 조선 최초의 사진이었다.
 
95번째 줄:
</gallery>
 
위 사진의 수(帥)자가 쓰인 [[어재연 장군기]]는 이때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미국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메릴랜드 주)|애너폴리스]] [[미국 해군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10월 22일]] 136년만에 장기대여 형태로 반환되었다.<ref>《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인물과사상사 강준만 저, 2007년 11월 19일, pp124~146</ref>
 
== 만년 ==
[[파일:Hman Kyaung Mandalay.jpg|thumb|left|upright|[[만달레이]]의 실버 파고다 ([[1889년]]무렵)]]
[[1884년]]부터 [[1885년]]에 걸쳐, [[찰스 조지 고든|찰스 고든]]의 뒤를 따라 [[수단]]의 [[하르툼]]에 원정하여 울슬리 남작(GJ Wolseley)의 사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촬영된 사진은 현존하지 않는다.
108번째 줄:
{{각주}}
 
== 바깥 고리 ==
{{위키공용분류|Felice Beato}}
* [http://ocw.mit.edu/ans7870/21f/21f.027/beato_people/fb2_essay03.html 베아토 연표]{{언어고리|en}}
128번째 줄:
{{Authority control}}
{{기본정렬:베아토, 펠릭스}}
 
[[분류:1832년 태어남]]
[[분류:1908년 죽음]]
[[분류:제2차 아편 전쟁 관련자]]
[[분류:이탈리아계 영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