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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세에 공자의 사상이 본문의 여러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춘추필법). 그렇게 《춘추》에서 공자의 사상을 읽으려고 하는 춘추학이 일어났다.
전한 무제때에 공양전에 의거하는 춘추학을 내건 [[동중서]](董仲舒)는 《춘추》를 법가 사상의 통치 원리를 나타내는 책이라 주장하였다. 그 후, [[오경박사]]가 설치되어 《[[공양전]]》, 《[[곡량전]]》을 연구하는 학관을 세웠고, [[신나라]] 때에는 [[유흠]](劉歆)이 《[[좌씨전]]》을 연구하는 학관을 세웠다. 후한 대에는 《[[좌씨전]]》을 학관에 유지했음에도, 학자들이 주로 《[[공양전]]》을 연구를 하였다. 결국 《[[좌씨전]]》을 [[복건]](服虔)이 훈고학에[[훈고학]]에 근거하여 주석을 만드는 등, 《[[공양전]]》을 연구하는 공양학을[[공양학]]을 압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공양학에서는[[공양학]]에서는 [[하휴]](何休)가 주석을 붙여 《춘추공양해고》를 만들었지만, 서진의[[서진]]의 [[두예]](杜預)가 《춘추》 경문과 《[[좌씨전]]》을 하나로 합쳐서 주석을 단 《춘추경전집해》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이후 춘추학의 기본이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춘추경전집해》을 바탕으로 《춘추정의》(春秋正義)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나라 이후에는 삼전(특히 《[[좌씨전]]》)은 《춘추》의 주석으로는 부정적으로 생각되어, 송나라 시대에는 삼전을 배척하고 새로운 주석이 만들어졌다.
 
{{사서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