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ok |
|||
73번째 줄:
{{인용문|노예들은 굉장히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백인들이 가진 권한을 동일하게 가질 수 없다.|1857년 연방 대법원 판결문}}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북위 36˚ 30' 위에 위치한 북부의 영토 내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도 역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판결문에서 [[로저 토니]]는 "북위 36˚ 30' 위의 북부 영토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노예 소유를 금지하는 의회의 결정은 헌법에 근거하지 않은 사항이기에 이를 무효로 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태니의 판결에 대해 민주당원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공화당원들은 이 결정에 '자의적인 헌법의 왜곡'이라고 반발했다. 공화당원들은 드레드 스콧이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 하지 못한다면 대법원은 [[미주리 타협]]의 합헌성에 대해 논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또 다른 드레드 스콧 판결"이
=== 남북 지역차 ===
줄 96 ⟶ 82:
하지만 역사가들은 두 지역간에 사회, 문화적 환경이 매우 달랐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남부에서 부자들이 모든 옥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가난한 백인 농부들은 생산성이 적은 자투리 땅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노예 [[반란]]에 대한 두려움과 노예 해방 주의자들의 [[선전]]물은 남부의 군대를 노예 해방주의를 비롯한 모든 "주의"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남부인들은 자신들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장한 ‘공화적 가치’(republican value)에 충실한 반면, 북부가 변화하고 있고, 새로운 "주의" 따위에 너무 쉽게 변한다고 불평했다. ([[조지 워싱턴|워싱턴]], [[제퍼슨]], [[메디슨]] 등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공화당원들이 노예제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헌법 입안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노예제를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문제는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와 같은 큰 [[개신교]] 종파들을 북부와 남부 종파로 가르게 되었다. 산업화로 인해 8명의 유럽 이민자 중 7명은 북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북부에서 남부로 이사하는 백인들보다 남부에서 북부로 가는 백인들이 두 배가량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인구의 이동 문제 역시 남부인들이 방어적이면서도 호전적인 정치적 모습을 보이는데 일조했다.정안과 크리텐던 타협안을 통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은 실패했고, 남부 지도자들은 링컨이 노예제 확장을 중단하고 폐지시킬까 걱정을 하였다. 노예제가 존재하던 주들은 하원에서 이미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세력이 늘어나는 북쪽과는 대조적으로 의회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앞으로도 계속 소수파로 남게 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에 찬성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정부를 카나와(kanawha)로 부르자고 했지만 [[1863년]] [[6월 20일]]에서 조합에서 [[웨스트 버지니아]]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에는 제퍼탈퇴를 선언을 했고, [[1861년]] 2월엔 남부의 여섯 개 주가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 했다. 같은 해 [[2월 7일]]에 일곱 개 주가 [[미국 남부 연합|남부 연합]]의 임시헌법을 채택했고, 또한 그 일곱 주의 주도로 [[앨라배마 주]]에 있는 [[몽고메리 (앨라배마 주)|몽고메리]]를 임시수도를 삼았다. [[1861년]] 2월 [[워싱턴DC|워싱턴]]에서 열린 전쟁 전 평화회담은 위기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남아있는 여덟 개의 노예제를 찬성하는 주는 남부연합 가입을 거절했다. 남부 연합의 군사력은 남부 경계선 안에 있는 대부분의 요새를 장악했다. 이에 맞서 [[제임스 뷰캐넌|뷰캐넌]] 대통령은 보급선 《스타오브 더 웨스트 호》를 [[섬터 요새]]에 보내 저항을 시도 했다. 그러나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부 캐롤라이나군에 의해 보급선이 불타버려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작전에 실패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
[[파일:Confederate Batteries 2.jpg|right|thumb|남부 연합군에 의한 섬터 요새의 포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