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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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하천으로, [[한강|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ref>청계천의 원류로 볼 수 있는 하천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백운동 계곡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이고 다른 하나는 삼청공원에서 발원하는 '''삼청동천'''이다. 현재는 둘 모두 복개된 상태인데, 백운동천(복개 구간 2.50km+백운동 계곡 0.30km)이 삼청천(복개 구간 2.40km)보다 더 길어 청계천 본류의 지위를 차지한다. 위 내용은 대한민국의 관찬 자료집인 《[http://rhms.river.go.kr/WebForms/sub_03/Books/한국하천일람(2012.12.31기준).pdf 한국하천일람]》([[국토교통부]] 발간)과 이에 대응하는 지도집 《우리가람 길라잡이》([[한국수자원공사]] 발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f>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발원지에서부터 잰 본류의 길이는 10.92&nbsp;km, 유역 면적은 50.96&nbsp;km²이나,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nbsp;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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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 13,04610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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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놓여진 다리다다리이다. 〈서울지도〉에 다리 표시만 되어 있을 뿐 이름은 알 수 없다<ref>〈서울의 하천〉 239쪽</ref>
* 모전교(毛廛橋) :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 광통교(廣通橋) : [[세종로|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다다리이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 (신덕왕후)|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왕자의 난|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다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1946년]] 배우 [[심영]]이 이 곳에서 [[김두한]]에게 피격당해 하복부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 장통교(長通橋) :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그룹|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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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수표를 놓기 전에는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 ; 지금의 종로5가 부근의 마전교와는 개별)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하랑교(河浪橋)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하랑위교(河浪尉橋), 화교(樺橋 또는 花橋), 화류교(樺榴橋), 하교(河橋)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청계 3가 센츄럴 호텔지점(관수교와 세운교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교(新橋) : 장사동 250번지 일대에 있었던 다리로, 하랑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경지략〉에만 기록되어 있던 다리다다리이다. 창덕궁과 남산의 조선신궁을 일직선으로 연결했으며, 1900년대 이후 경성의 돌다리를 콘크리트로 바꿀 때 가장 먼저 바뀌었다. 이 다리는 [[백운동천]] 상류에 있던 신교와는 다른 다리다다리이다.<ref>〈서울의 하천〉 244쪽</ref>
* 효경교(孝經橋) : 영풍교(永豊橋), 효교(孝橋),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했다.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세운교와 배오개다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 후기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했다.
* 태평교(太平橋) : 창선방교(彰善坊橋), 마전교, 오교(午橋)라고도 불렸다. 다리 부근에 마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다리다다리이다. [[1907년]] 일제가 오간수문을 헐어버린 뒤로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 영도교(永渡橋)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라고도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공업고등학교|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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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광통교''' : [[파일:Cheonggyecheon-KwangtongBridge.jpg|thumb|240px|두 번째 다리 광통교]]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 세월교 : 광교와 광통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다다리이다.
* 광교 : 조선시대 광통교 터에 위치하며, 주황색으로 칠해졌다. [[우정국로]]와 [[남대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장통교''' : 도보 전용 다리로, 조선 시대의 장통교를 계승했으나 제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관철교였다.<ref name="cw186">{{서적 인용 |저자=서울특별시 홍보기획관 홍보담당관 |날짜=2006 |제목=청계천복원사업 백서 1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 |쪽=186}}</ref>
* 삼일교 :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 '''수표교''' :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철제 다리다다리이다. 하지만 기존의 수표교를 청계천으로 다시 옮겨오는 데에 문제가 많아 계속 사용된다.
* 관수교 :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세운교 :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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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내다리 :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주기 위해 나비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어졌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2교였다.<ref name="cw186" />
* 다산교 :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지봉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푸른내다리였다.<ref name="cw186" />
* '''영도교''' :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다아치교이다.
* 황학교 : [[황학동]]에 위치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 (서울)|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비우당교 :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유관]]의 집인 비우당(庇雨堂)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하정로]]와 [[마장로|마장로19길]]을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비우교였다.<ref name="cw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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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물다리 : [[정릉천]]이 청계천과 만나는 데서 이름을 지었으며,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뤘다.
* 고산자교 : [[고산자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고산자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신답철교 : [[중앙선]]의 철교다철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장동철교, 청계천 복개 당시에는 마장철교로도 불렸다.
* 제2마장교 : [[마장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마장역]]과 [[신답역]]이 있다.
* 사근인도교 : [[용답역]]의 2번 출구로, 청계천 건너의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 세월교 :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자전거와 보도용 다리다다리이다. (상류의 세월교와는 다르다.)
 
== 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