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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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하천으로, [[한강|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
발원지에서부터 잰 본류의 길이는 10.92 km, 유역 면적은 50.96 km²이나,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 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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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 13,04610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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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놓여진
* 모전교(毛廛橋) :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 광통교(廣通橋) : [[세종로|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1946년]] 배우 [[심영]]이 이 곳에서 [[김두한]]에게 피격당해 하복부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 장통교(長通橋) :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그룹|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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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수표를 놓기 전에는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 ; 지금의 종로5가 부근의 마전교와는 개별)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하랑교(河浪橋)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하랑위교(河浪尉橋), 화교(樺橋 또는 花橋), 화류교(樺榴橋), 하교(河橋)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으며,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청계 3가 센츄럴 호텔지점(관수교와 세운교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교(新橋) : 장사동 250번지 일대에 있었던 다리로, 하랑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경지략〉에만 기록되어 있던
* 효경교(孝經橋) : 영풍교(永豊橋), 효교(孝橋),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했다. 1959년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는 장통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세운교와 배오개다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 후기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했다.
* 태평교(太平橋) : 창선방교(彰善坊橋), 마전교, 오교(午橋)라고도 불렸다. 다리 부근에 마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 영도교(永渡橋) :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라고도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관왕묘|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공업고등학교|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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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광통교''' : [[파일:Cheonggyecheon-KwangtongBridge.jpg|thumb|240px|두 번째 다리 광통교]]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 세월교 : 광교와 광통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 광교 : 조선시대 광통교 터에 위치하며, 주황색으로 칠해졌다. [[우정국로]]와 [[남대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장통교''' : 도보 전용 다리로, 조선 시대의 장통교를 계승했으나 제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관철교였다.<ref name="cw186">{{서적 인용 |저자=서울특별시 홍보기획관 홍보담당관 |날짜=2006 |제목=청계천복원사업 백서 1 |위치=서울 |출판사=서울특별시 |쪽=186}}</ref>
* 삼일교 :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 '''수표교''' :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철제
* 관수교 :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세운교 :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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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내다리 :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주기 위해 나비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어졌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2교였다.<ref name="cw186" />
* 다산교 :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지봉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푸른내다리였다.<ref name="cw186" />
* '''영도교''' :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 황학교 : [[황학동]]에 위치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 (서울)|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비우당교 :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유관]]의 집인 비우당(庇雨堂)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하정로]]와 [[마장로|마장로19길]]을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비우교였다.<ref name="cw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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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물다리 : [[정릉천]]이 청계천과 만나는 데서 이름을 지었으며,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뤘다.
* 고산자교 : [[고산자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고산자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신답철교 : [[중앙선]]의
* 제2마장교 : [[마장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마장역]]과 [[신답역]]이 있다.
* 사근인도교 : [[용답역]]의 2번 출구로, 청계천 건너의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 세월교 :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자전거와 보도용
==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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