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송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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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宋象賢, 1551년 ~ 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였고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송준]](宋駿, 1564년 ~ 1643년) : 자는 진보(晉甫), 호는 성암(省菴).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정언으로 임명된 뒤 병조정랑·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97년 장령·사성(司成)·사간 등에 제수되고, 다음해 홍문관직제학이 되어 왕에게 『중용』을 강론하였다. 1599년 호조참의가 된 뒤 병조참의·이조참의·형조참의 등 6조의 요직을 역임하고, 대사성·부제학 등을 지냈다. 160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상사 박이장(朴而章)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명을 받아 유구국(琉球國)의 국정을 살피고 돌아와서 상전(賞典)과 옥권(玉圈) 1부, 공로를 치하한 시 1절을 하사받았다. 1606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병으로 체임되었고, 1608년 당쟁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다시 복직되어 1623년(인조 1) 이조·병조·형조 등의 당상으로 요직을 거쳐 1626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성암유고』가 있다.
* [[송인명]](宋寅明, 1689년 ~ 1746) :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영조조에 [[이조]][[판서]] 등을 지내며 탕평책에 협조하였다. 1736년에 우의정을 거쳐 1740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 [[송상순]](宋祥淳, 1842년 ~ 1921년) :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조천읍]] 출신. 철종(哲宗) 14년(1863) 제주별시(濟州別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1862년(철종 13) 제주민란으로 제주안핵 겸 찰리사(濟州按覈兼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이 부임해 왔는데, 그때 실시한 과거에서 급제한 것이다. 1878년(고종 15) 양지현감(陽智縣監), 1979년(고종 16) 2월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하였다가 1880년(고종 17)에 장령(掌令)에 제수(除授)되어 떠났다.되었고, 1881년(고종 18)에 봉상시첨정(봉상시첨정), 지평(持平)을, 1882년(고종 19)에 정의현감(旌義縣監), 1892년(고종 29)에는 헌납(獻納)을 지냈다. 1880년(고종 17) 문묘의 생우전(牲牛錢) 2백냥을 마련하는 등 제주도민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 [[송주순]](宋柱淳, 1888년 7월 7일 ~ ?) :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출신 지방행정 관료이다. 1942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집성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