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앱
편집 요약 없음
43번째 줄:
[[시황제]]는 도량형·문자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등 여러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 [[흉노]] 등의 북방 기마민족에게 침략을 대비 하기 위해서 각각의 나라가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던 장성을 정비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만리장성의 건설은 주로 농민들의 강제적인 노동에 의해 진행되었으므로, 가혹한 노동과 극도의 법치주의에 국내는 불만이 높아지는 바람에 반란의 싹을 길렀다. 시황제는 흉노의 침략이 일어나자 다시 북쪽으로 공격을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입혀지는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게다가 남쪽으로도 원정대를 보내서, 현재의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펼쳤다. 이 때, 남방에는 남해, 상, [[구이린 시|계림]]의 세 개의 군이 놓였다. 이것은, 중국 왕조에 의한 남방 지배의 시작이기도 한다.
 
=== 시황제의 사후와 멸망 ===
시황제가 [[기원전 210년에210]]년에 사망하자, 벼슬아치들은 시황제의 사후, 환관 [[조고]](趙高)가 태자 [[부소]](太子扶蘇), 승상 이사나 시황제의 혈족자 등 권력자를 차례차례로 암살해, 어리석은 [[진 이세황제|2세 황제를황제]]를 허수아비 황제로서 권력을 제멋대로하게 하고 폭정을 하였다. 시황제의 사후 진나라는 혼란해져서, 다음 해에는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반란이 발발,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소란 상태가 되었다.
 
[[진 이세황제]]와 조고는 [[장한]](章邯)을 장군으로서 토벌군을 보낸다. 장한은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서, 진승군을 격파하고, 그 다음으로는 [[초 (춘추전국)|초나라]]의 항량군도 격파했다. 그러나 [[항량]](項梁)의 조카 [[항우]](項羽)와의 결전에 깨져 장한은 포로가 된다. 항우는 [[함양]]으로 향하는 도중에 반역의 기색을 보인 진나라 병사 20만을 죽여 버렸다.
 
장한이 대패한 것을 들은 조고는 낭패 해졌고, 2세 황제를 폭정이 오명을 씌운 다음 암살해, 자영을 세워 민의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자영등에 의해서 주살당했다.
줄 53 ⟶ 54:
== 진(秦)나라의 행정구역 ==
[[파일:秦代行政區劃及疆域圖.jpg|350px|섬네일|left|진나라의 행정 구역도]]
 
진시황은 6국을 정복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초기에 36군을 설치하였으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주변정복에 따라 군이 추가되었다 여기서는 56개군(郡)으로 소개한다.(42군설, 46군설과 48군설도 있음)
* 수도권 : 내사(內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