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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스파르타]] 시민에게는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었고, 오직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적이었다. 일상용품의 생산과 상업도 페리오코이의 부담이었고, 화폐는 사용하기 불편하게 쇠로 되어 있었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아 대외 무역은 가급적 억제하였다.
 
=== 아테나이아테네 ===
 
[[아테나이|아테네]] 귀족정치의 중심은 [[아르콘|집정관]](άρχων, <small>아르콘</small>)과 [[아레이오파고스]](Ἀρειόπαγος) 회의였다. 집정관은 처음 군사, 종교, 민사의 3명이었으나, 후에 9명으로 증가하고 임기가 끝나면 자동적으로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의 의원이 되었다. 아레이오파고스 회의는 부유한 명문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되며 귀족 지배의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일반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고, 집정관도 여기서 선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기원전 7세기 초에 상인 계급이 성장하였다. 상인 계급이 떠오르면서 여러 [[폴리스]]에서 긴장 상태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각 폴리스를 지배하던 [[귀족]] 정권들은 새로이 부를 얻어 성장하여 정치적 권력을 얻고자 하던 상인들의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아테나이]]는 토지ㆍ농업 위기를 겪어 내분에 빠졌다. 기원전 7세기 말 경 평민은 아테나이의 귀족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621년 [[아테네의 집정관|집정관]] [[드라콘]]이 중벌주의에 따른 엄격한 개혁 입법을 내놓았으나, 분쟁을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기원전 594년에 [[솔론]]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부채를 말소하고,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였으며, 상공업을 장려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시민을 재산 소유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고 정치참여의 비중을 다르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각 부족으로부터 100명씩을 골라서 400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을 만들게 했다. 이러한 [[솔론]]의 개혁은 종래의 귀족지배를 존속시키면서,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하층시민에게도 불완전하나마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이렇듯 온건한 개혁으로 솔론은 평민의 권리를 신장하면서도 귀족 정치를 지켜주어 아테나이는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