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사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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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타이완
|상태 = 대만 점령
|결과 = 일본의일본 제국의 승리
|이유 =
|교전국1 = [[일본 제국]]
|교전국2 = 파이완 족[[파이완족]]
|지휘관1 = [[사이고 쓰구미치주도]]
|지휘관2 =타우케톡
|병력1 = 3,600명
|병력2 = 알려지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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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 섬]] 주민의 대만 실종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며 [[일본]] [[외무성]]을 옹호했다. 외무경인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드롱의 중개를 통해 샤를 르 장드르와 회담을 가졌고, 내무경인 [[오쿠보 도시미치]]도 르 장드르의 의견에 주목하여 르 장드르는 고문으로 외무성에 고용되게 되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조선]] 출병을 둘러싼 [[정한론]] 등으로 갈등이 있었고, 가바 야마 스케노리와 [[가고시마 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도 [[사쓰마 번]]의 대만 출병을 건의했다. 이러한 강경 의견의 배경에는 [[폐번치현]]에 의해 실직한 40만명에서 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족들의 불만의 해소할 배출구를 찾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1873년]] 특명 전권대사로 청나라에 건너간 소에지마 외무경은 수행원인 [[야나기하라 사키미츠사키미쓰]](柳原前光)를 통해 [[미야코 섬]] 주민의 대만 실종 사건을 추궁했지만, 청나라의 외무 당국은 대만 원주민은 ‘화외’(化外)이며, 청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건이라고 답변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그 해 가을, [[조선]] 사절 파견을 둘러싸고 정부가 분열되었다. ([[메이지 6년 정변]]) 또한, 다음 해 [[1874년]] 1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암살 미수 사건, 2월 [[에토 신페이]]의 반란([[사가의 난]])이 일어나는 등 내정 불안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는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만 정벌을 결정했다. [[1874년]] 4월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를 대만 번지 사무국 장관으로서 또한 육군 중장 [[사이고 쓰구미치]] 대만 번지 사무 도독으로 각각 임명하고 군사 행동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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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출병에 대해서는 정부 내부나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와 미국 공사 드롱의 후임인 존 빙햄(John Bingham) 등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 특히 참의 [[기도 다카요시]] 등의 조슈 번 계열의 인사는 [[정한론]]을 부정하면서, 대만에 해외 파병을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반대의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4월 18일]], 기도 다카요시는 참장직에 사표를 제출하고 하야했다. 따라서 정부는 일단 파병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사이고 쓰구미치주도]]는 독단으로의 출병을 강행했고, 나가사키에 대기하고 있던 정토 군 3,000명을 출동시켰다. 정토군은 2개 대대였으며, 그 중 친다이 병은 1개 대대였고, 나머지는 ‘식민병’으로 사쓰마 등 규슈 각지의 사족으로 점령지 영주를 전제로 모집, 편성한 것이었다. [[5월 2일]] 사이고의 명을 받은 타니간성다니간 성(谷干城), [[아카마츠아카마쓰 노리요시]]가 이끄는 주력군이 [[에도 막부]]로부터 계승한 작은 군함 3척으로 나가사키를 출항하자 정부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추인하였다.<ref group="주해">군함 3척은 타카사고마루다카사고마루, 다이우(大有), 메코(明光)였다. 또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국에 보낸 것은 기함 [[류조 (철갑함)|류조]]와 군함 [[쓰쿠바 (코르벳)|쓰쿠바]]였다.</ref>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국립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공문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1874년]] [[4월 4일]], [[산조 사네토미]]에 의해 대만 번지 사무국이 설치된다. (이후의 임명은 당시 태정대신이었던 산조 사네토미가 봉칙했다.) 같은 해 [[4월 5일]], 대만 번지 사무 도독으로 [[사이고 쓰구미치]]가주도가 임명된다.<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46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TAG_S1=InfoD&IS_KEY_S1=%E5%8F%B0%E6%B9%BE%E5%BE%81%E8%A8%8E%E4%BA%8B%E4%BB%B6&IS_KIND=MetaSummary& 대만정벌사건/17 / 十六三条太政大臣ヨリ外務省ヘ達/十七親勅]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ref> [[4월 6일]] 타니 다테키와 [[아카마츠다니 노리요시다테키]]와 아카마쓰 노리요시가 대만 번지 사무국 참전과 사이고 쓰구미치를주도를 도와 성공을 이룰 것을 약속한다.<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48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TAG_S1=InfoD&IS_KEY_S1=%E5%8F%B0%E6%B9%BE%E5%BE%81%E8%A8%8E%E4%BA%8B%E4%BB%B6&IS_KIND=MetaSummary& 대만정벌사건/19 19 발령]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 자료집</ref> [[4월 7일]], 해군성에서 포함 [[모오슈]], [[운요호]], 보병 제1소대, 해군포 2문과 [[육군성]]에서 구마모토진 관할 보병 1대대, 포병 1소대의 출병 명령을 명할 수 있었다.<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49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TAG_S1=InfoD&IS_KEY_S1=%E5%8F%B0%E6%B9%BE%E5%BE%81%E8%A8%8E%E4%BA%8B%E4%BB%B6&IS_KIND=MetaSummary& 대만정벌사건/20 20 출병 명령]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 공문서관</ref> 이것이 그 경위였다.
[[파일:Battle of Stonegate.jpg|thumb|left|263px|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수문 전투, 당시 일본인의 판화<ref>"A Yankee in Meiji Japan" The Crusading Journalist Edward H. House By James L. Huffman, p.94 [http://books.google.com/books?id=WngYfDz1pAMC&pg=PA94&dq=%22Battle+of+Stone+gate%22&sig=guaCIhA8Ik9ic8HVQKnOoIiUmWo#PPA94,M1 (A yankee in Meiji Japan)]</ref>]]
[[5월 6일]], 대만 남부에 상륙하여 대만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분쟁이 생겼다. [[5월 22일]], 대만 서남부의 사료 항(社寮港)에 전군을 집결시키고, 사이고의 명령에 의해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ref name=mori/> [[6월 3일]]에는 무단사무단 사(牡丹社) 등 사건 발생 지역을 제압하고 현지의 점령을 계속했다. 전사자는 12명이었다.<ref name=mori/> 그러나 현지 군은 열악한 위생 상태 속에서 [[아열대]] 지역의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피해가 확산되어 조속한 해결이 필요하게 되었다. [[말라리아]] 창궐로 인해 561명의 병력이 병사했다.<ref name=mori/> 또한 청나라는 일본의 행동에 항의하면서 철군을 요구했다.
 
=== 협상 ===
메이지 정부는 이 출병 때 청나라에 통지를 하지 않았고, 또 청나라 내부의 이권을 가진 열강에도 통지나 교섭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종종 분쟁의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실책이었다.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 영국의 주일 대사 파크는 당초 일본의 군사 행동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 후 영국 공사 [[토머스 프랜시스 웨이드|웨이드]]의 주선으로 화의가 진행되어, 8월 전권대신으로 [[오쿠보 도시미치]]가 베이징에 부임하여 청나라 정부와 협상을 했다. 오쿠보는 르 장드르와 프랑스인 법학자 [[쿠스타브 브아소나드]]를 고문으로 대만 문제를 협상하였고<ref name=toyama>遠山(1979)p.113</ref>, 주된 교섭 상대는 총리아문 대신인 [[혁흔|공친왕]]이었다.<ref name=mori/>
 
회담은 난항을 겪었지만, 웨이드의 중개와 이홍장의 유화론도 있었다. [[10월 31일]], ‘청일 양국 호환 조약’이 체결되었다.<ref name=mori/><ref name=toyama/> 그에 따르면, 청나라가 일본군의 출병을 보민의 의거로 인정하고 일본은 ‘''[[타이완 원주민|생번]]''’(대만 산악족)<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94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KEY_S1=%E4%BA%92%E6%8F%9B%E6%9D%A1%E6%AC%BE&IS_TAG_S1=InfoD&IS_KIND=SimpleSummary& 대만정벌사건/65 70 태정대신 포고/七一互換条款]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ref>에 대한 법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1874년]] [[12월 20일]]까지 정벌군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또한 청일 양국 간 호환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조난당한 일본인에게 위로금 10만냥을 지불하고 40만냥<ref group="주해">일본이 이 출병에 소요된 전비는 이 10배에 달했다. 平尾『子爵谷干城傳』(1981)p.398</ref>을 대만의 제반 설비 비용으로 스스로 사용하도록 비용을 마련했다.<ref>[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30119500?IS_STYLE=default&IS_LGC_S32=&IS_TAG_S32=&IS_KEY_S1=%E5%8F%B0%E6%B9%BE%E3%80%80%E5%9B%9B%E5%8D%81%E4%B8%87%E4%B8%A1&IS_TAG_S1=InfoD&IS_KIND=SimpleSummary& 대만정벌사건/66 72 互換〓単] 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ref>또한 청나라가 일본군의 행동을 승인했기 때문에 류큐 국민은 일본인이라는 것, 즉 류큐의 일본 귀속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형태가 되었다.<ref name=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