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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ref>백동현 저, 『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1994년, 고려대학교 학위논문(석사)) pp. 45 ~ 48</ref>
 
조국광복회의 파생 조직은 원산·함흥·길주·흥남·성진 등지까지 그 규모를 확대했으며, 그중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곳은 갑산(甲山)공작위원회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1937년]]에 항일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되어 기관지 <화전민>을 발행하는 한편, 지하 조직 건설·군사시설 파괴·군사수송 방해 등 항일운동을 폈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부대와 함께 만주에 있는 관동군에 대한 대대적인 유격전, 그리고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했는데. [[1937년]] 당시에 [[김일성]]이 지휘했던 보천보전투와 동녕현성전투가 대표적이다. [[1938년]]에 들어선 739 명의 조국광복회원이 체포되어서 소규모 파생 조직이 괴멸하는 고비를 겪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내·만주·연해주 일대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ref>성주현 저, 『1930년대 천도교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연구 - 갑산ㆍ삼수ㆍ풍산ㆍ장백현 지역의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2000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pp. 174 ~ 188</ref>
 
== 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