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Fsuh (토론 | 기여)
12번째 줄:
 
== 개요 ==
기원전 770년 [[주나라|주(周)나라]]가 낙읍(洛邑)으로 동천(東遷)하고 나서 기원전 221년 진(秦)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여러 제후가 대립 항쟁한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 칭하고, 그 전반기인 기원전 770~403을 춘추 시대라 한다. 이 시기에 주(周)나라가 본가인 [[봉건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西周)말에 800800개 가까이 되던 국가는 춘추 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晉)이나 초(楚)는 근처의 도시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현(縣)이라 이름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가운데서도 희미하게희미하게나마 주의주[[주나라|(周)]]의 종주권으로서의 명목만을명목을 지킨 것은 패자(覇者)의 힘이다. 패자는 회맹(會盟)<ref>회맹(會盟)은 제후 혹은 그 사신이 유력자를 중심으로 서로 만나서 맹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會)는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여 모이는 회합이며, 맹(盟)은 소의 왼쪽 귀를 잘라서 그 피로 조약서를 쓰고 회합한 제후가 피를 마시는 의식을 말한다. 이 회맹의 맹주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회맹의 성격은 초기에는 패자가 주 왕실에 위임이 되어, 국제 친선·가족 도덕 등 중원 사회의 질서 유지에 목적이 있었지만, 차차 강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수(攻守)동맹으로 변화해 갔다.</ref>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주나라|(周)]]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목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회([[기원전 651년]]),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천토(踐土)의 회([[기원전 632년]])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초(楚)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을 격파하고([[기원전 597년]])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 초의 장(莊)왕이 주실의 왕위의 상징인 ‘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춘추 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지방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深耕除草)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전국 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地代)의 형태로부터 자작농의 현물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춘추 시대, 전국 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관된 역사적 시점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 춘추 시대 말기의 정세 ==
춘추 시대의 말기가 되자 북의 진(晉), 남의 초가 그초(楚)가 권세를 잃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중의 하나로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남쪽에 오(吳)와 월(越)의 두 나라가 갑작스럽게 발흥하게 된다. 이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춘추 시대의 후반이 되면 우선 오가 역사에 등장한다. 북의 진(晋)은 초(楚)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의 군사적인 근대화를 원조했다. 그로 인하여 오는 초의 도읍을 함락시킬 정도가 되었고 초는 오의 남쪽에 있는 월과 동맹을 맺어 오를 공략하게 했다. 그 결과, 오와 월 사이에서는 사투가 되풀이되었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불리고 있는 유명한 고사(故事)가 된다. 그 결과, 오왕 부차(夫差)는 패하여 자살하고, 오는 멸망한다.
 
승리를 한 월왕 구천(句踐)은 세력을 북방으로 진출시켜 산둥(山東)이나 허난성(河南省) 남동부의 여러 나라를 그 산하(傘下)에 거두어들이고, 한때 도읍을 낭야(琅邪)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오 역시 왕 부차가 노(魯)와 제(齊)를 무찌르고, [[기원전 482년]]에는 황지(黃池)에 제후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진(晋)과 회맹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이 두 나라의 땅은 일찍이 기원전 4000년경에 수도경작(水稻耕作)의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은(殷)으로부터 서주시대에 걸쳐서는 거의 이렇다 할 문화도 없이 잊혀져버린 지역이었다. 춘추의 후반이 되어 갑작스럽게 이 두 나라가 출현하여, 한때는 진이나 초를 능가하는 형세를 나타내게 된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오의 영역을 병합한 월도 역시 얼마 안 가서 쇠망해버렸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