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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고조선|1392년에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기원전에 [[단군]]이 건국한 국가}}
{{조선 표}}
'''조선'''(朝鮮, {{문화어|리조조선, 리씨조선, 약칭: 리조<ref>북한에서 출판된 《백과전서》 제2권(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3년) 547쪽에는 “리조조선”의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나라이름은 조선이였으나 오늘의 조선 또는 고대국가인 고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 왕실의 성을 따서 리조조선 또는 리씨조선이라고 부르며 이를 략칭하여 리조라고도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대한제국기를 포함해서 1392년부터 1910년까지를 “리조조선”으로 본다.</ref>}}, [[1392년]]~[[1897년]])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며, 505년간 26명의 왕이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통치하였다. 공식 명칭으로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때로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ref>1884년 10월 9일자로 재가된 전문 7장 46조로 되어 있는 우정 관련 규칙([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296&cid=1593&categoryId=1593 대조선국우정규칙], 大朝鮮國郵征規則)을 보면 '''대조선국'''의 명칭이 나온다.</ref> 흔히 '''조선'''(朝鮮)혹은'''조선왕조'''(朝鮮王朝)라고 부르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7100400209201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47-10-04&officeId=00020&pageNo=1&printNo=7401&publishType=00020 조선(朝鮮) 말살론(抹殺論)의 일면(一面)] 동아일보 1면 정치 기사(1947.10.04, 칼럼/논단)</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30400209215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3-04&officeId=00020&pageNo=15&printNo=21755&publishType=00020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일제(日帝)조어「조선(朝鮮)」으로 써야 옳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는 동아일보 구독자 김복중 씨의 주장(1992.03.04)</ref> [[1897년]], [[광무개혁]]으로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멸망하였다.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은 무관 [[조선 태조|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존속됐다. 조선은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군주|임금]]과 신하에 의한 치를 중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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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침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친일 내각이 구성이 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한양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조선국 폐지 조서와 함께[[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서 국호로서의 조선은 더이상 쓰이지 않았다멸망하였다.
 
== 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