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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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국적= {{국기나라|대한민국}}
|별명= 아명(兒名)은 '''김굉집'''(金宏集) <br /> 자(字)는 경능(敬能) <br /> 아호(雅號)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br /> 시호는 충헌(忠獻)
|학력= [[1868년]] 알성문과 급제
|직업= 한말의 문신, [[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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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홍씨
|자녀= 딸 김씨
|부모= 아버지 김영작(金永爵) <br />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 成氏)
|친척=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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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동풍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86072037978-89-86072-03-7
|페이지=37
}}</ref> 한편 [[일본]]의 철도와 위생상태, [[증기 기관차]]와 [[자동차]]의 운용 등을 본 김홍집과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김홍집은 귀국한 뒤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 (易言)》을 소개하여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케 한 공으로 예조 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책을 소개한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개화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유학자 중심의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곧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으로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으로 복직했다. 그는 [[조선책략]]과 [[이언]]을 소개하며 [[조선]]은 미국, 청국, 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과 지역의 유림들은 그가 흉악한 모의를 꾸민다며 규탄하였다.
 
=== 귀국과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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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199036889-7199-036-8
|쪽=66~67쪽
}}</ref>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18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서 활약하였고, [[윤치호]]를 통역으로 채용하여 번역과 내용해석을 전담했다. [[제물포 조약]] 체결에는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 참여하여 [[일본]]측의 요구를 일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여러 조약의 체결을 잘 처리한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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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일본]]의 변화된 관제와 복식을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 또한 양력의 사용과 우편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 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ref>{{서적 인용
|저자=김삼웅
|제목=친일정치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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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동풍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86072037978-89-86072-03-7
|페이지=39
}}</ref> 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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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평가 ==
김홍집은 행실이 그가 주장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친일파 애국자’로 표현되곤 한다.<ref name="실록친일파" />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정치가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일국의 총리로 동족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방조한 점'''과 고종에게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하는 조칙에 서명하도록 한 강요한 점 등은 여전히 그의 정치적 기준에 대한 논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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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을 연기한 배우 ==
* [[김세윤]] - [[1982년]] ( [[풍운]] ) [[MBC]] 드라마
* [[최상훈]] - [[1990년]] ( [[조선왕조500년 대원군]] ) [[MBC]] 드라마
* [[임혁주]] - [[1996년]] ( [[찬란한 여명]] ) [[KBS]] 드라마
* [[강태기]] - [[2002년]] ( [[명성황후 (드라마)|명성황후]] ) [[KBS]] 드라마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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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영의정]]
[[분류:친일파]]
[[분류:19세기 한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