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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金億, <small>일본식 이름: </small>岸曙生, [[1896년]] [[11월 30일]] ~ ?)은 [[한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 생애 ==
[[평안북도]] [[곽산군|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시]]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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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ref>김재용, [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 친일문학 작품목록] 《실천문학》 (2002년 가을호)</ref>.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조선]]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