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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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화교의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인 오장경(吳長慶)이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국 군사 4000명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들의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화교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ref>http://www.d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5107</ref> 이어 1884년 인천 제물포항 주변에 청국조계지가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와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f>http://news.donga.com/3/03/20141208/68426101/1</ref> 그러나 화교 사회는 우리 정부의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아래 위축되어 갔다. <ref>http://www.ichinatown.or.kr/introduction/overseas_chinese/drift.asp</ref><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729365</ref>
그 이후 1998년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도에는 22,917명으로 점차 안정적이 되었다.
<ref>http://news.mk.co.kr/newsRead.php?no=990922&year=2014</ref>
현재(2013년)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화교는 약2만이며, 가장 많을 때는 10만명까지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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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의 연대별 구분 ==
{{독자 연구 문단}}
전술한 개념은 공간적 구분으로 연대별로 구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진·한(秦·漢) 시기에는 육로 ‘비단길’로 통해 중국에서 서역까지 교류되고, 해로 일본까지도 교류되었다. 이 시기부터 화교 현상이 나타났다.
당(唐) 시대에 들어가서 많은 중국사람이 해외로 나가 정주했다. 화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당(唐) - 송(宋) (618년 - 1270년)
한반도 경우를 보자면 송나라 해상 무역 상인들은 송나라의 건국 초기인 10세기 중기부터 고려사회를 드나들기 시작하여, 무역물품의 교역이라는 경제적인 영역 이외, 정치·사회·문화적 교섭 등의 영역에서도 중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그들 가운데 일부는 고려의 관리로 임명되는 등 고려 국내 정치에도 참여하였다.<ref>최영호, 2010, 고려시대 송나라 해상 무역 상인의 활동 시기와 양상, 인간과 문화 연구, 231-260(3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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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reflist각주}}
 
==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