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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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대한민국}} ===
{{본문|한중 관계}}
냉전 당시 [[대한민국]]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을 지원한 적성국이었다. 이런 과거사 문제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하여 활발한 민간 교역을 하면서도, 공식적인 외교 라인의 부재는 양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사실상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관계를 맺기 이전의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사람과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과 대한민국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뎠다. 중국은 북한과 미국간, 북한과 일본간의 중재, 북한, 대한민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1980년대 중공민항기 사건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민간 계약은 더욱 활발해졌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명에 가까운 한민족들, 특히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조선족]])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소동이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상대로 [[중국 공산당]]의 억압적인 조치를 도왔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은 더욱 침묵했으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부추긴 것도 그렇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교역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인해 한중 관계가 악화되었다. <ref>{{웹 인용 |url=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19|제목= 한-중 수교 (1992.8) |확인일자=2009-07-11 |형식= |웹사이트=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저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인용문= 국제적 배경으로 1989년 12월 〈미·소간의 몰타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이 선언된 것을 들 수 있고, 동북아에서는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이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수교의 성공이 중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ref> [[1992년]] [[8월]]부터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