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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월]] 초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월]] 여성동우회가 경성여자청년회계와 신사상연구회계의 계파싸움 끝에 분열되었다. 여성동우회의 분열로 허정숙은 [[경성여자청년동맹]]으로 건너갔다. [[1월 17일]] 친경성여자청년회계로 조선여자강습소를 운영하던 [[김현제]](金賢濟)와 [[대한애국부인회]]의 이정숙(李貞淑) 일파, 그리고 [[주옥경]](朱鈺卿) 등 [[천도교]] 신파의 여성운동단체인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 등의 주도로 [[여성해방동맹]](女性解放同盟)이 결성되자 [[여성해방동맹]]에도 창립 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허정숙은 분열은 세력의 약화를 꾀한다며 [[경성여자청년동맹]]과 [[여성해방동맹]]의 통합과 협력을 설득하였다.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 부녀부 기자,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당시 잡지사에는 많은 여기자가 있었지만 신문사 여기자는 허정숙 외에는 김경숙(金慶淑 또는 金敬淑) 외에는 거의 없어서 주목받기도 했다. [[동아일보]] 입사 초반 그는 [[인도]] [[국민회의]]의 의원이며 여류 시인인 [[인도]]의 [[사로지니 나이두]]의 [[영문]]시를 한글로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학예부와 부녀부, 사회부를 동시에 맡았지만 그는 모두 소화해냈고, 남자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산악과 교통편이 불편한 농촌 현장의 취재에도 직접 뛰어다녔다. 이때 그의 남편 [[임원근]] 역시 [[동아일보]] 기자로 있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부가 한 신문사에서 근무하였다.
 
[[동아일보]]의 여성담당, 학예담당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25년]] [[1월 21일]]에는 [[주세죽]], [[박정덕]]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조직하여 경성여청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주말에는 각 친목회의 주말 조기축구나 야구회에도 나가 남자 회원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인맥을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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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단발 운동 =====
{{참고|단발}}
[[1925년]] [[8월]] 허정숙은 [[주세죽]], [[김조이]]와 함께 [[경성부]]에서 공개적으로 가위를 들고 단발을 감행했다. 이는 화제가 되어 기자들이 취재를 하기도 했다. 그 날의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1925년]] 당대의 여류여성 명사이자 '주의자(主義者)'인 [[주세죽]](朱世竹) 허정숙(許貞淑) [[김조이]](金祚伊) 3명이 한꺼번에 단발을 감행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종래 제도의 구속을 타파하고, 부자연한 인습을 개혁'한다는 이유에서다.(조선일보 1925년 8월 22일자)'고 보도하였다. [[8월 23일]]자 [[조선일보]] 시평(時評)란은 "외국에 잇서서는 이미 진부한 사(事)"이나, "우리 조선에 잇서서 단행한 그 용기는 다대타"고 논평했다.<ref name="chossdd"/> 그리고 단발 운동의 홍보와 단발의 위생성, 편리함 등을 홍보하고 다녔다.
 
당시 [[조선]]사회는 '(사회)주의자'나 '기생'의 단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ref name="chossdd"/> "…이 댐에 출가한 후에 남편이 술먹고 주정하면서 머리채 끄들며 때릴가 하야 예방주사로 깍어버렸소. …끌채를 안 잽히려거든 빤빤히 삭발하시야…"처럼 빈정거리거나(조선일보 1925년 11월 7일자), '단발하면 후년(後年) 대머리(禿頭)가 된다'는 외신기사가 소개됐다.(조선일보 1927년 5월 3일자) 허정숙은 이러한 단발 반대 기사를 근거없는 편견이라며 서양 여성들의 단발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