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이라 마사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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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이라 마사요시'''({{llang|ja|奥平昌能}}, [[1633년]] [[8월 25일]] ~ [[1672년]] [[8월 24일]])는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우쓰노미야 번]]의 2대 번주, [[야마가타 번]]의 초대 번주이다. 어릴적 이름은 센후쿠마루({{lang|ja|千福丸}})이다.
 
[[간에이]] 10년(1633년) 7월 21일, 우쓰노미야 초대 번주 [[오쿠다이라 다다마사 (1608년)|오쿠다이라 다다마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간에이 17년([[1640년]]) 10월 28일, 아버지를 따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배알하였다. [[쇼호]] 3년([[1646년]]) 11월 9일, 원복식을 치렀고, 그 이듬해 12월 12일, [[사카키바라 다다쓰구]]와 함께 유년이던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보좌역을 명받았다. [[간분]] 8년([[1668년]]) 2월, 아버지 다다마사가 사망함에 따라 그 뒤를 이었다.
 
죽은 아버지의 법요를 열던 간분 8년 3월 2일, [[조카마치]]에 있는 보리사인 [[고젠 사 (우쓰노미야)|고젠 사]]({{lang|ja|興禅寺}})에서 중신들 간의 원한에 의한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였다. 마사요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어느 한쪽 가신만을 편들고 양측을 다 처벌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의 금령에 저촉되는 순사 소동도 겹쳐, 반년 뒤 마사요시는 우쓰노미야 번에서 야마가타 번으로 삭감전봉되었다. 다만, 쇼군 가문의 [[고렌시]]라는 위광, 그리고 쇼군 이에쓰나의 보좌역이었던 점 때문에 비교적 가벼운 처분에 그친 것이었다. 그러나 양측을 고루 처벌하지 않은 번의 판결은 가신들 사이의 불만을 야기했고, 다수의 가신들이 주군을 떠나갔다. 이때의 원한은 훗날 [[에도의 3대 복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조루리자카의 복수]]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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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오쿠다이라 다다마사 (1608년)|오쿠다이라 다다마사]]
|후임자=[[마쓰다이라 다다히로]]
|직책=[[우쓰노미야 번]] 번주 (오쿠다이라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