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무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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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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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의 친정 일가들의 폐단을 보았던 한무제는 [[여태자]] 일가를 역모로 처단한 뒤, [[유박 (창읍애왕)|창읍애왕]]마저 [[기원전 88년]] 죽자, [[구익부인]] 조씨 소생 [[유불릉|전한 소제]]를 후계자로 결정한다.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구익부인]]이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아들을 낳자 요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만에 출산한 것을 예로 들어가며 총애를 더하였지만 아들 불릉을 황태자로 세운 뒤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였다. 만년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내치에 치중하였으며 세금감면 정책을 추진, 다시 먼 거리에 있는 윤대(輪臺:[[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둔전(屯田)을 폐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무제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열어놓았다.
 
권신이나 외척을 배제하고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하였다. 출신 배경이 한미한 관료들을 등용했고, 흉노족 원정시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 등 이민족 포로 중에서도 능력이 되는 인재를 채용하였다. 그 뒤 임종이 가까워 오자 [[곽광]](霍光)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