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이아 공국: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수정
51번째 줄:
육지에 둘러쌓여 있던 1388년에 해안을 확보하겠다는 신념으로, 사보이 백국은 [[니스 (프랑스)|니스]] 주변의 몇 킬로미터의 해안선을 획득했다. 이 더 이상의 해안선 확장은 15세기 당시에 사보이아가 전반적으로 침채되면서 그러지 못하였다. 특히 프랑스 같은 이웃 국가들의 압력으로, 해안 개발이 저조해졌고,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사보이의 특징을 주게 하였다.
 
[[아메데오 8세]] 통치 시기는 사보이아의 경제, 정책의 전환점이 되던 시기였고, 이 영향은 국가 역사 오랫 동안 남았다. 그의 장기 통치는 전쟁(백국은 [[몬페라토 공국]]과 [[살루초]] 군주국]]을군주국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과 더불어 개혁, 칙령이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논란이 된 행동들이였다행동들이었다. 거기서 첫 번째는 1434년에 그가 [[성 모리스회]]를 세우고 [[은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샤토 드 리파이]]에서 퇴각하기로 결정한 것이였다것이었다. 1439년에는 아메데오 8세가 [[대립 교황]]으로 임명되어 받아들였으며(펠릭스 5세라는 이름을 부여받음), 비록 그가 그 이후에 12달만에 사임하였지만, 기독교도로서의 종교적 단일성을 해치는 행위였다.
[[파일:Italy_1494.svg|thumbnail|left|1494년의 이탈리아.]]
 
60번째 줄:
하지만 그의 장남 아메데오가 1431년에 이른 나이로 사망하자, 둘째 아들 [[루도비코 디 사보이아|루도비코]]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루도비코가 계승하던 당시 병약한 아메데오 8세는 아주 독실하였지만, 권리가 약했고 실질적인 권리는 아내이자 [[루이 11세]]의 여동생인 [[욜랑드 드 발루아]](비올란테 디 발루아)에게 내주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피에몬테가 파리의 국왕의 것으로 갈 수 있었기에 사보이아의 일에 거의 자유롭게 조종하였다.
 
몇 년간 공국의 경제는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전쟁 뿐만이 아니라, 비올란테의 한심한 통치와 아마데오 8세의 계속된 통치가 [[베르첼리]]의 불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였다때문이다. 나라의 미래는 소년인 [[필리베르토 1세 디 사보이아|필리베르토 1세]]의 손에 맡겨졌지만 10년을 통치한 뒤, 17살이란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자리는 나라의 부활을 시킬 것으로 약속한거처럼 보이던 [[카를로 1세 디 사보이아|카를로 1세]]가 계승하였다.
 
=== 16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