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국가인민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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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군은 공산권과 관련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바르샤바 조약군의 진압 임무를 지원했으며 아프리카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프라하의 봄]]당시 동독은 7전차사단과 11차량화소총사단을 파견해 소련군을 지원할 계획을 세웠지만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군대가 타국을 침공했다는 국제적 비난이 우려되어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신 소련군의 병참을 지원하였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동독군은 전투 준비(Gefechtsbereitschaft)에 들어갔는데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잠수함발사 탄도유도탄]]과 같은 막강한 병기들을 잇달아 전개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독군의 85%는 끊임없는 경보에 시달리며 25~30분 안에 그들의 주둔지에서 5~7km를 벗어나는 훈련을 했다.동원령은 이틀안에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70년대 초에 [[주동독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시 동독군의 서베를린 점령에 할당했다.'작전명 도심'으로 명명된 작전에서는 두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32000여명의 병력들이 주동독 소련군 6독립근위차량화소총여단과 함께 서베를린을 장악하자는 내용이였다. 390여대의 전차,400여대의 장갑차,400여기의 대전차화기,450여문의 포병전력이 동원될 것으로 짜였으며 해당 작계는 1988년까지 갱신되었다. <ref>{{웹 인용|url=http://ciar.org/ttk/mbt/armor/armor-magazine/armor-mag.1994.nd/6berlin94.pdf}}</ref>
 
1980년부터 벌여진 폴란드의 노동운동으로 1981년에 동독군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시 소련군을 지원할 계획을 했지만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수상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