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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 시대와 [[대몽항쟁|몽골 침략]] 이후로 본관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해졌다. 중앙정권의 변화 및 몽골의 침략으로 상경귀족과 토성층의 몰락이 비일비재하자 문벌의 기반도 약해졌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본관제도는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변화하게 된다. 하나는 조선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지방 토성의 분정을 허락지 않거나 격하시켰고, 그에 따라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중인계급(6방)으로 격하되거나 몰락하였었다몰락하였다. 다른 하나는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이 강화되고, 또 거주지 이전이 손쉬워졌다. 이에 따라 본관제도는 현실적 통치제도가 아닌 관념적인 혈연의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족보의 발간으로 성관 통합이 이뤄지고, 또 군소 성관은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을 함으로써 집단적 신분질서로서의 본관제도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본관은 다른 씨족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그가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신분적 상징이 되었으며, 성씨만 가지고 신분을 구별할 수 없게 되자 본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ref name='ks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