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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1770년 영조 46년에 발간) 향시편에 '청주목 내 조치원장(鳥致院場)은 4일과 9일 열린다'고 소개되어 있다.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의 순조 원년(1800년) 10월 24일 기록에도 모두 조치원이라는 기록이 있고, <1872년 지방도(地方圖)> 청주목 지도에도 조치원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에 앞서 [[조선 성종]] 때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청주목 역원편에는 현재의 조치원 위치에 장원(場院)이 있었음이 소개되어 있다.(場院, 在州西三十九里. → 장원, 청주 서쪽 39리에 있다.) 장원(場院)의 의미로 보아 조치원에는 시장(場)과 관영숙박시설인 원(院)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문헌상 조치원에 관한 기록은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문헌을 살펴보면 조치원과 발음이 유사한 지명으로 <1872년 지방도> 연기현 지도에 [[조천]](鳥川)과 저치제언(苧峙堤堰)이 등장하는데, 조천과 저치제언은 조치원이란 지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추정된다. 선조실록 1595년 11월 9일 이성남의 공초 내용에공초에 '청주는 목방(木方, [[동쪽]])인데, 연기현의 연(燕)은 새(鳥)이며 새는 금방(金方, [[서쪽]])'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저치제언(苧峙堤堰)은 세종 9년에 연기현감을 지낸 허만석이 축조한 농업용 제방 및 방죽으로 추정되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되어 있다. 저치(苧峙)는 띠풀언덕이라는 의미로, 예전에 뗏장으로 벽을 쌓고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이 많다고 하여 불리는 뗏집거리가 지금도 마을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1926년 [[조천]](鳥川) 제방이 축조되기 이전의 조치원은 [[조천]]과 [[미호천]]이 휘돌아가는 범람원(氾濫原)이었는데, 하천변에 억새풀이 무성하여 새(鳥)들이 서식하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