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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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1919년]] 8월 최고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그 중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哈爾濱) 주둔 백계 러시아부대에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9월경 노령(露領)으로도 2개 소대를 보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훈련과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1920년]] 3, 4월 결사대들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의 처단에 주력하였다.
*또한, 본단의 목적인 남만주와 우리 나라 내부의 기맥을 상통해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도모하고자 전국적으로 모군(募軍)·모금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金仁叟) 등의 활동으로 다수 단원을 포섭해, 본단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해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폭약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또한,
*[[유일우]]·[[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많은 자금을 모금했으며,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기도 하였다대립하였다. 단군기원 또는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과 대한민국 연호사용을 주장한 [[조병준]](趙秉準)·[[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 등의 민국독립단으로 분리 대립했지만, 독립운동에는 상호 협력하였다.
*[[1920년]] 7월에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와[[대한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사령부로[[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었다.<ref>《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ref><ref>《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