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1세기 중국 사람
편집 요약 없음
5번째 줄: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후한 이전 [[전한]]의 유사를 두루 채집하여 《후전(後傳)》 수십 편을 짓는 등 훌륭한 역사가로 이름높던 아버지 [[반표]](班彪)로부터 독서와 학문을 배웠다. 아홉 살에 문장에 능했고 16세의 나이로 수도 [[낙양]]의 태학(太學)에 들어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건무 30년([[5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반고는 태학에서 돌아와 3년상을 치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서]]》(漢書
) 1백 편의 저술을 이어받았지만, 이때문에 사사로이 나라의 역사를 짓는다(私修國史)는 고발을 당해 체포되어 구금당한다. 동생 반초(班超)가 나서서 황제에게 반고가 《한서》를 짓는 목적은 한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지 조정을 비방하거나 할 뜻은 없음을 변론했다. 훗날 반고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후한 명제|명제]](明帝)는 반고의 집에 금과 전을 지급하고 역사책을 계속 저술하도록 허락했다. 어느 날 명제가 반고에게 "경(卿)의 동생은 편안한가?"라고 물었을 때 반고는 "관리가 되어 책을 베껴다 늙으신 어머니를 공양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명제는 반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난대령사(蘭台令史)로 삼고, 조를 받들어 진종(陳宗), 이민(伊敏), 맹이(孟異)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纪) 및 여러 전기(傳記)를 짓게 했다. 반고는 후에 낭(郎)으로 옮겨지고, 전교비서(典校秘書)로서 다시 공신(功臣), 평림(平林), 신시(新市), 공손술(公孙述) 등의 열전을 짓게 되었다. 당시 반고와 같은 난대령사를 맡고 있던 부의(傅毅)도 반고와 함께 나란히 문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반고는 반초에게 보낸 글에서 "무중(武仲)은 속문(屬文)에 능해서 난대령사가 되었는데 그 붓이 종이에 한 번 닿으면 쉬는 법이 없다"고 평한다. 반고 또한 조칙을 받들어 그 아버지가 해왔던 저술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줄 35 ⟶ 36:
[[분류:92년 죽음]]
[[분류:한나라의 정치인]]
[[분류:1세기 중국 사람]]
[[분류:한나라의 역사가]]
[[분류:한나라의 시인]]
[[분류:산시 성 (섬서성) 출신]]
[[분류:1세기 중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