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
잔글 →배경 |
||
2번째 줄:
==배경==
===촉성회파와 협의회파===
[[1928년]] 무렵 만주 지역에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부가 정립된 가운데, 정의부가 재만 독립운동단체를 영도하기 위해 유일당 촉성운동을
회의의 결과, 촉성회 측은 민족유일당
===혁신의회와 재만책진회===
이에 [[1928년]] 8월 일부가 정의부를
그리고 한교(韓僑)의 자치를 위한 잠정적 행정구역으로 전 참의부의 관할구역을 남구(南區), 재야혁명당 소재 관할구역을 중구(中區), 전 신민부의 관할구역을 북구((北區)로 나누어 통합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신민부와 참의부가 결속, 혁신의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기성회와도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됨으로서 오랜 숙원이었던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협의회 측에 대항할 새로운 진용으로 집행위원<ref>촉성회 측(정의부 탈퇴 구 간부) 이청천·김동삼·김원식·김상덕 외 4명, 참의부 측 김회산·김소하 외 2명, 신민부 측(군정파) 김좌진·황학수·김시야(金時野)·최호(崔灝)·정신</ref>들을 구성하였다.
정의부를 이탈한 일부, 신민부의 군정파, 참의부가 촉성회에 투합하여 과도적 임시기관으로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이를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로 개편하여 활동하였다.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는 혁신의회와는 이신동체(二身同體)로서 중앙집행위원회장에 김동삼, 동 위원에 김좌진·전성호(全聖鎬) 등을 선출하고 유일당의 촉성에 주력하기로 의결<ref>1. 일반 구성분자를 독려하여 당의 집성토대(集成土臺)에 분투 진출케 할 것, 2. 조선의 혁명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여 만주 운동의 내재적 모순을 정리하고 대당촉성의 준비에 노력할 것, 3. 대당이 아직 성립되기 전인 과도기에서 악독한 마수의 침입을 방지하는 한편 소위 만몽(滿蒙)침략 적극정책을 배제할 것.</ref>하였다.
혁신의회는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를 결성하였지만 [[1929년]] 5월 이전까지 군정부를 조직하지 못해 김좌진·김시야 등은 북만주로, 이청천은 오상(五常)현으로 김희산·박희곤(朴希坤)·이백파 등은 남만주로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간 후 일부가 일본 관헌에 체포됨으로써 촉성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후 책진회는 정의부에서 탈퇴하여 책진회에서 활동한 김동삼·김상덕·김원식 등에 의해 근근히 유지되었다.
책진회를 떠난 김좌진 등은 세력의 만회에 주력하고 원래 신민부의 근거지였던 중동선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민족단체의 조성에 분주하던 중 같은 해 8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ref>그 강령을 보면 1. 국가에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철저한 해방, 2. 민족생활의 안정 및 혁명적 강령의 철저, 3. 혁명민중의 조직 완성이었다. </ref>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순 국수파인 김좌진 등과 무정부주의자의 일파인 남대하(南大廈)를 비롯하여 국내 인사들이 제휴한 단체로 중동선 일대를 관할할 수 있는 영안현 산시(山市) 역전에 본부를 두고 주석에 김좌진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반대파인 재중국청년동맹 일파인 공산주의 청년에게 김좌진이
==국민부의 성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