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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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전역상자=후한말
}}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은 중국 [[후한]] 말기 호족 지주에 의한 토지겸병의 위기에 끊임없이 직면해 있던 농민이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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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동 (중국)|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후한)|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 (중국)|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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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주성 전투 ===
{{전쟁 정보
|분쟁=유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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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2=
}}
 
=== 유주성 전투 ===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 (후한)|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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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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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성 전투 ===
{{전쟁 정보
|분쟁=청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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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2=
}}
 
=== 청주성 전투 ===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중국)|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중국)|유주]] 태수 [[유언 (후한)|유언]]은 교위 [[추정 (후한)|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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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 전투 ===
{{전쟁 정보
|분쟁=영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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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2=1만 명 전사
}}
 
=== 영천 전투 ===
[[예주]] [[영천]]의 산골 [[장사현]]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우지만 패배하고 주준이 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가자 파재는 이를 포위한다. 그러자 주준은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 (후한)|장량]]과 [[장보 (후한)|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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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과 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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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종 전투 ===
{{전쟁 정보
|분쟁=광종 전투
줄 133 ⟶ 134:
|사상자2=
}}
 
=== 광종 전투 ===
그러나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빼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는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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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양 전투 ===
{{전쟁 정보
|분쟁=곡양 전투
줄 156 ⟶ 157:
|사상자2=
}}
 
=== 곡양 전투 ===
[[유비]]와 [[주준]]이 [[양성]]에서 [[장보 (후한)|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해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 (후한)|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를 앞세워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승리한다.
 
결국 [[장량 (후한)|장량]]은 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이고 만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
=== 양성 전투 ===
{{전쟁 정보
|분쟁=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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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2=[[장보 (황건적|장보]], [[고승 (황건적)|고승]] 사망, [[엄정 (황건적)|엄정]] 항복
}}
 
=== 양성 전투 ===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와 [[주준]]의 관군과 [[장보 (후한)|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 (후한)|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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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 전투 ===
{{전쟁 정보
|분쟁=완성 전투
줄 202 ⟶ 203:
|사상자2=
}}
 
=== 완성 전투 ===
남양 지역에서는 3월 [[장만성]]이 황건군을 이끌고 남양을 공격해 남양 태수 [[저공]]을 죽이고 이에 6월 새로 임명된 남양 태수 [[진힐]]이 장만성을 죽였으나 다시 [[손중]], [[조홍 (후한)|조홍]], [[한충 (후한)|한충]] 등이 군사를 모아 형주의 완성에서 저항하자 [[유비]]와 [[주준]]은 남양 태수 [[진힐]], 형주 자사 [[서구 (삼국지)|서구]]와 합류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다. 전투 중 [[손견]]의 1500명의 군사와 합류하여 다시 재정비를 하여 유비는 북문, 손견은 남문, 주준은 서문을 공격한다.
 
손견과 유비는 성벽을 넘어 황건적들을 무찌르고 손견이 조홍을 사살하고 손중 역시 동문으로 도망가다가 유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한충도 남양 태수 진힐에게 죽고 10월 마지막 남은 [[손하]]의 황건군마저 괴멸당하면서 남양군 10개의 고을이 평정된다.
 
{{-}}
=== 황건적의 재봉기 ===
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 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 성 (산서성)|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