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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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 암살 당시 현장에 남아있던 칼집 등의 물증이나, 3일후에 암살된 [[이토 가시타로]]의 동지([[고료에시]](御陵衛士))등의 증언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에 의해서라고 믿어졌지만, 베인 상처로 보면 [[왼손잡이]]에 의해서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채용하면 왼손잡이에다가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달인인 료마를 살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인물, [[사이토 하지메]]라는 설도 있다.(사이토의 신센구미 복귀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중에서는 고료에시(高臺寺黨)로써의 사이토 설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이토가 왼손잡이라는 설 자체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설정이며, 그가 실제 왼손잡이였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사건 후, 11월 26일에 막부에서 조사를 받은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진술에서 ' 우리는 프로다. 만약 우리가 했다면 나카오카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실제로 같이 참변을 당했던 나카오카 신타로는 이틀 정도 더 생존해 사건을 증언함)' 라며 관여 된 것을 부정하였다.
곤도와 같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오이시 쿠와지로도 이 사건만큼은 부정했다. 그는 신센구미 내부에서도 이토 가시타로를 암살한,신센구미암살하였다며 내에서도신센구미에서 손꼽는 검객이었다.
료마가 속해있던 토사번도사 번 지사들이 신센구미 설을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었던 당시에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이시에게 무수한 고문을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오이시가 억지로 인정을 한 적이 있지만 이내 부정하면서 ' 사건 이후 곤도 국장이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와타나베가 료마씨를 해치운 것은 회자될 만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을 들었을 뿐 ' 이라며 일축했다. 곤도와 오이시 둘다둘 다 료마 암살 혐의 때문에 참수되었지만 이는 토사번 지사들의 복수심에 가까운 맹렬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실질적인 증거 없이 억지로 몰아 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료마는 지금과 같은 인지도는 없었지만 이름난 지사였다. 따라서 막부 순찰대가 그를 해치운 것은 큰 공로이므로 자랑을 하면 했지 숨길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센구미는 암살 당시 부터 한결 같이 혐의를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