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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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 [[부더]]에서 헝가리의 국왕인 [[서포여이 야노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사망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쉴레이만 1세]]의 지원을 받은 추기경인 프라테르 죄르지(Fráter György)는 [[1551년]]에 사망할 때까지 야노시 지그몬드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야노시 지그몬드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야기에우워(Isabella Jagiełło)는 [[1559년]]에 사망할 때까지 야노시 지그몬드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568년]]에는 근세 유럽에서 최초로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토르다토르더(Torda) 칙령을 제정했다. 또한 모든 종교의 종파 사이에서 개방된 토론을 실시하는 것을 장려했고 [[로마 가톨릭교회]], [[루터교]], [[칼뱅주의]], [[유니테리언]], [[유니테리언주의]] 대표 간의 공개 토론을 주재했다. [[157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2세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2세]]를 헝가리의 국왕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포기했으며 1570년부터 1571년까지 트란실바니아 공을 역임했다.
 
[[1571년]]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했을 때에 남긴 유언에서 재무부 장관 출신인 가스파르 베케시(Gáspár Bekes)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트란실바니아의 귀족들은 그의 유언을 존중하지 않고 바토리 이슈트반(Báthory István, [[스테판 바토리]])을 자신들의 새로운 공으로 추대했다. 이 때문에 가스파르와 바토리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내전에서 승리한 바토리가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