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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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6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2세 공작이 헝가리의 국왕인 [[벨러 4세]]와의 [[라이타 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바벤베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된다. 바츨라프 1세는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스트리아 지배를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직할 통치령으로 만들기 위해 오토 폰 에베르슈타인(Otto von Eberstein)을 지배자로 파견했지만 이는 오스트리아의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1156년]] [[9월 17일]] 오스트리아를 공작령으로 승격시킨 문서인 프리빌레기움 미누스(Privilegium Minus)에서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여자들도 오스트리아의 공작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공작 부인이었던 게르트루데(Gertrude)는 이 문서를 근거로 공작 계승권을 주장했다. 바츨라프 1세는 모라바의 후작을 역임하고 있던 장남인 블라디슬라프(Vladislav)가 게르트루데와 결혼하도록 지시했다. 게르트루데의 계승권을 이어받은 블라디슬라프는 자신이 오스트리아 대공임을 선언했다. [[1247년]] [[1월 3일]]에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하면서 바츨라프 1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1252년]] [[2월 11일]]에는 독일의 국왕인 [[하인리히 7세 (독일)|하인리히 7세]]의 아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Margarete)와 재혼했다. [[1253년]] [[9월 23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왕위는 [[오타카르 2세]]가 승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