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3세 이사우로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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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성상파괴운동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로 인기가 높아진 레오 3세는 점차 자신의 종교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722년]], [[유대인]]과 [[몬타누스파]]에게 [[세례성사|세례]]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기간 중 가장 이례적인 것은 바로 [[성상파괴운동|성상파괴정책]]이었다. 그 정책의 유래는 [[이슬람교]]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대체로 레오 3세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이고 성상파괴는 그리스도 [[합성론]](예수의 격인 인격, 신격이 혼합되었다 주장. 지금의 [[콥트교]]가 해당되며, [[단성론]]은 [[아리우스파]]로, 이단이다)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 남경태 역 《비잔티움 연대기》제1권:창건과 혼란, 바다출판사, 서울 2007. 584~6쪽</ref> 실제로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나 그 이후에 개인적으로 성상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725년]] 성상의 파괴를 주창하는 [[주교]]들이 황제에게 간언을 올렸고 이에 영향을 받은 황제는 다음 해부터 성화 사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레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칼케의 청동대문의 성상을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성상파괴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서방 지역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대규모 반대가 있었다. 성상파괴를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러한 레오 3세의 움직임에 즉각 반발하고 [[라벤나]]에서 주민들의 무장봉기를 부추겼다. 이와 같이 상황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 3세는 끝내 성상파괴령을 거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레고리오 2세는 병사들에게 체포당하기 전에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3세]]도 전임 교황과 마찬가지로 성상파괴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731년]] 레오 3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교회에서 나오는 연간수입을 모두 몰수해버렸고 교황은 성상에 손을 대는 자는 모두 파문해 버리겠다고 맞받아쳤다. 이에 자극받은 레오는 [[발칸 반도]]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교구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