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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그림=|출생일=[[1577년]]|출생지=[[조선]] [[예천군|예천]](醴泉) 우망리(憂忘里)|사망일=[[1650년 7월 7일]]|사망지=[[조선]] [[안동부]]|사망원인=병사 (노환)|거주지=[[조선]]|국적=[[조선]]|학력=1605년(선조 38) 진사시(進士試) 합격|직업=문인|그림제목=|별명=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종교=유교([[성리학]])|배우자=|자녀=|부모=|친척=|서명=|웹사이트=}}
'''정영방'''(鄭榮邦, 1577년 ~ 165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이고,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다. 고조부는 홍문관 응교 정환(鄭渙), 증조부는 생원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이며, 생부는 정식(鄭湜), 생모는 안동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중용(中庸), 대학(大學),
당시(唐詩)에 뛰어났다는 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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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주위에서 권유에도 성균관에 들어지 않았다.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스승 [[정경세]]가 벼슬을 다시 권하였으나 "저는 성품이 졸렬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한 번 벼슬에 나가면 학업과 명예를 모두 잃을까 두렵습니다."라 하며 고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진성(眞城) 임천(臨川)(현 영양군 입압면 연당리)으로 들어갔다. 훗날 이곳에 연못을 파 서석지(瑞石池)라 이름 짓고 그위에 경정(敬亭)을 지었으며, 주일재(主一齋)를 축조하였다. 경인년(1650년)에 이르러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선어대(仙漁臺) 위에 띠 집을 얽고 '읍취정(揖翠亭)'이라 편액을 달았다.
== 저서 및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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