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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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주위에서 권유에도 성균관에 들어지 않았다.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스승 [[정경세]]가 벼슬을 다시 권하였으나 "저는 성품이 졸렬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한 번 벼슬에 나가면 학업과 명예를 모두 잃을까 두렵습니다."라 하며 고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진성(眞城) 임천(臨川)(현 영양군 입압면 연당리)으로 들어갔다. 훗날 이곳에 연못을 파 [[서석지]](瑞石池)라 이름 짓고 그위에 경정(敬亭)을 지었으며, 주일재(主一齋)를 축조하였다. 경인년(1650년)에 이르러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선어대(仙漁臺) 위에 띠 집을 얽고 '읍취정(揖翠亭)'이라 편액을 달았다. 읍취정(揖翠亭)에서 주자와 퇴계를 읽으며 유유자적 하던 그는, 경인년 7월 7일 운명하였다.
 
== 저서 및 작품 ==